옥천 강연에 나섰던 정지용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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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강연에 나섰던 정지용과 사람들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2.2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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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1925년 8월 15일 오후 8시부터 12시까지 4시간 동안 沃川公立普通學校(이하 옥천공보)에서 진행되었다는 문화강연. 청중이 400명이나 되었다는 이 강연은 옥천공보 동창회 주최로 열렸으며 정지용, 유석동, 조구순이 연사로 나섰다. 이날 강연의 사회는 유기원 씨가 맡았다.(「정지용, 1925년 옥천에서 강연하다」, 『옥천향수신문』, 2019. 2. 21, 4면 참조)

정지용은 「童謠와 兒童敎育」을, 유석동은 「基督敎란 如何한 宗敎인가」를, 조구순은 「文化園을 建設하라면」을 강연하였다. 강연이나 사회를 맡았던 이들은 누구인가? 유석동, 조구순은 정지용의 인맥동원, 유기원은 옥천공보 출신일 것이라는 가설을 설정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정지용은 동지사대학 신학부에 입학할 정도로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으니 「基督敎란 如何한 宗敎인가」를 강연한 早大 英語科 柳錫東과도 인연이 있었으리라. “그(함석헌1901-1989)는 동경유학시절에 일본 제일의 기독교 사상가였던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고 구원이 기성 교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도쿄 가시와기에서 열리던 성서 연구회를 통해 성경을 철저하게 공부했다. 그 시절 그의 동지들이 김교신, 송두용 그리고 유석동”(김동길, 「평생을 1인 1식...말과 글 ‘양면도’ 휘두른 시대의 사상가」-김동길의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8), 『조선일보』, 2018. 1. 6, 2면.) 등이다.

“1927년 도쿄에서 함석헌, 송두용, 김교신, 유석동(발행인), 양인성, 정상훈(편집인) 등은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창간 동인은 모두 동경에 있었기 때문에 집필 편집은 동경에서 하고, 인쇄 제작은 서울에서 하였다. 『성서조선』은 1942년 일본의 탄압으로 폐간되고 그 해 3월호에 실린 글이 문제가 되어 발행인과 독자들 수십 명이 투옥, 함석헌도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복역, 이듬해 출옥하여 8·15 광복까지 은둔생활”((http://doopedie.co.kr)을 하였다고 한다.
그땐 그랬다. 궁핍한 처지나 생활뿐만 아니라 민족의 핍진한 감정이 우위에서 괴롭히던 시절이었다. 슬프다.

「文化園을 建設하라면」을 강연한 조구순은 휘문고등보통학교 문우회 학예부에서 1923년 1월 25일에 창간한 『휘문』이라는 교우지에서 정지용과 함께 활동한 인물로 추측된다. 『휘문』(편집인 겸 발행인:니가끼(新垣永昌) 창간호는 A5판 123면으로 발행하였다. 여기에 “정지용은 「퍼스포니와 수선화」, 「텐잴리」를 譯, 조구순은 「孤獨」을, 정지용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던 박제찬은 「노래 골짜기」를, 이태준은 「秋感」과 「안정흡군의 死를 弔함」을, 신종기는 「雜感」을 발표한다. 휘문고등보통학교 문우회는 1910년 1회 졸업생 32명이 발기하여 1918년 정백과 박종화가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1920년 정지용, 이선근, 박제찬 등이 새로 영입되어 활동”(최덕교, 『한국잡지백년3』, 현암사, 2004.)하였다.

1923년 이세기가 펴낸 사화집인 「廢墟의 焰群」에서도 조구순의 활동상이 보인다. 『廢墟의 焰群』은 1923년 11월 조선학생회에서 A6판 34면으로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신봉조, 박팔양, 이세기, 방준경, 윤정호, 조구순, 염형우 등이 참여하였으며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다. 당시 학생들의 습작을 엮은 것이어서 문학사 평가를 받지 못하고 박팔양만이 시작활동을 계속하고 나머지는 문학과 거리가 있는 길을 걸었다”(http://encykorea.aks.ac.kr/). 해방 후 조구순은 1925년 4월 1일 설립한 대구공립보습학교(현 대구공업고등학교)의 교장(www.tktech.hs.kr)이 된다.

사회를 맡았던 유기원은 주최 측인 옥천공보의 동창회원으로 유추된다. “문화유씨 정숙공파의 후손인 유기원은 옥천공보 출신으로 그의 후손 유제만이 대전광역시 판암동에 거주”(향토사학자 이재하 구술)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유석동과 조구순은 정지용 인맥으로 그와 더불어 옥천에 강연을 하러 왔었고 유기원은 옥천 출신일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보다 정확한 관계는 또 다른 추가 자료가 확보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유추가 아닌 확실한 사실로 증빙되길 바란다.

정지용과 관련된 인물을 살펴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를 알아봄으로 그 당시 시대상과 인물들의 사회 관계망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야기가 샛길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잠깐 스친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은 어떤 사안이나 조직 그리고 체계의 기초를 닦아 쌓거나 마련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기에 지면을 빌어 밝혀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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