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이 처녀작으로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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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이 처녀작으로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4.18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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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작가는 때로 ‘산문적 상황에 내몰리기’도 하고, 더러는 ‘시적 상황에 부닥치기’도 한다.
그동안 필자가 눌언자적 자세로 촘촘히 작가들을 들여다보니 그렇더라는 것이다. 즉 그러한 성질의 교집합적 공통점을 발견했다는 말이지 뭐 거창한 것은 아니다.
1919년, 복잡한 산문적 상황에 내몰려 소설 「삼인」을 처녀작으로 발표하였던 시인 정지용.
일제강점기라는 국가의 역사적 상황 말고도 개인적인 불우한 환경은 정지용을 괴롭히고 그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가정적인 궁핍과 도시에서 맞이하게 되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작용과 반작용 그리고 각지에서 모인 불규칙적인 모양을 갖춘 교우관계. 이러한 것들은 정지용을 더욱 고향으로 집중하도록 작용하였다. 이러한 이질적 환경에서, 정지용의 고향으로 향한 집중은 옥천을 소설적 공간으로 채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작용의 응축으로 소설을 탄생시키게 된 정지용.
불우하고 궁핍한 시절을 보냈던 정지용은 1919년 12월 『서광』 창간호에 자전적 이야기인 소설 「삼인」을 처녀작으로 발표한다. 휘문고보로 유추되는 학교를 다니던 세(조, 최, 이) 친구가 등장하는 「삼인」. 이들은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인 옥천역에 도착한다.

ⓐ“慶鎬야 나난 너의 男妹가 업스면 무산滋味로 사라잇겟니? 너의 아버지난 돌아보지도 안을더러 집안에 게시지도 안이하시난구나, 이 다 ― 쓰러져 가난 거지움갓흔 집에 잇스시기가 실으셔서 그러시난지난 모로겟스나 쓰러져 가난 집에 굼쥬리고 입지 못고 억지로 사라가난 내야 무슨 罪이란 말이냐? 慶鎬야 慶鎬야 나난 너의 男妹를 爲鎬야 이집을 직히고잇다 쓸쓸한 이世上에 붓허 잇난것이다 그도져도 인졔 집터지 팔니엿다난 구나 그毒蛇갓흔 터主人이 집을 여내라고 星火갓치 조르난 구나” - 「삼인」 중에서
ⓑ崔의집은 有數한 財産家로 모다 崔富者집 崔富者 집이라고 부른다 오날은 崔富者의 큰 아달 昌植의 生日이다 昌植은 三十 假量된 靑年으로 郡書記 勤務를다말도 잘하고 法律도 잘안다하야 崔主事난 한 사람이라 고도하고 或은 <身言書判>이 다 ― 具備하다 稱讚듯난이다 午後 네시붓터난 昌植의 親舊들만 모이난 잔치를 연다 손님의 大部分은 同官 親舊들이다. - 「삼인」 중에서

정지용의 자전적 역할로 등장하는 ‘조’는 ⓐ처럼 옥천에 도착하여 어머니의 푸념을 듣게 된다. 아버지 부재에 대한 어머니의 불평이 최고조에 이르렀음과 맞닥뜨린 것이다. 그러나 최 군의 집은 ⓑ처럼 군청에 근무하는 젊은 형의 생일잔치를 기생을 불러서 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 그만큼 최 군의 집을 부유하게 서술하고 있다. 할머니는 최 군에게 문밖으로 출입을 엄격히 제한한다. 부정한 것에 대한 방지책의 일환인 것이다.
이렇게 대조적인, 아주 극한적인 대립 구조를 이룬 두 가정의 모습을 통하여 정지용은 당시 사회상을 극렬하게 혹은 아주 적절하게 지적하여 보여주고 있다.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이 처녀작으로 왜 소설을 택했을까? 다양한 각도에서 유추가 가능하겠지만 대략 서술하여 보기로 한다.
첫째, 정지용의 교우관계 중 그와 가장 넘나듦이 자유롭고 빈번하던 이태준의 영향이다. 둘째, 홍수로 인한 정지용 고향집의 몰락이다. 셋째, 정지용 부친의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동생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이다. 셋째, 부친이 돌보지 않는 집안 살림을 어머니가 맡아 꾸려야하는 고달픈 삶의 모습들이 정지용의 앞을 가로 막았다는 현실에 대한 불만의식이다. 넷째, 휘문고보의 학내문제와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가 정지용을 산문적 상황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즉 정지용이 시로써 문단에 입문하기에는 매우 복잡한 산문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정지용은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소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시대상이 산문, 즉 소설이 시보다 우위를 점하였다는 설이 더러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시에 있어 천재적 끼를 발휘했던 정지용이 시를 쓰지 못하였다는 것, 그리고 산문적 상황에 정지용이 일정 부분 족쇄를 차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한국 현대문단사에 큰 손실이었다.
슬프다.
그렇기에 시대와 역사와 문학과 문학인은 일직선상에 나란히 놓여있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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