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병장에서 육군대장까지… ‘화려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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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병장에서 육군대장까지… ‘화려한 삶’
  • 천성남국장
  • 승인 2016.07.0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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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청산출생, 대전고 재학 중 6·25전쟁 사병 자원입대
육사 12기 입학 후 보안사령관 역임 후 34년 만에 제대
지역발전 초석 다져… 대전 간 4차선 국도·옥천조폐창 견인
청산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식. 왼쪽 7번째가 고인.

충북 옥천 출신의 박준병 자유민주연합 부총재(전 민정당 사무총장)가 지난 3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1933년 6월 21일 옥천 청산에서 태어난 박 부총재는 학도병 출신이다. 대전고 재학 중 6·25 전쟁이 터지자 사병으로 자원입대했다.

병장 계급으로 육군사관학교(12기)에 입학해 1956년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했다.
보병 제20사단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등 요직을 거쳐 국군보안사령관(육군 대장)을 마지막으로 1984년 7월 34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했다.

6·25 당시 이등병에서 육군 대장급인 국군보안사령관까지 오른 박 부총재는 최근까지 육군에서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4년 9월 고향인 옥천이 포함된 보은·옥천·영동 선거구에서 민정당 지구당위원장에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인 1985년 2월 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해 전국 2위의 높은 득표율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박 부총재는 이후 내리 3선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민정당 국책조정실장과 사무총장, 민자당 사무총장 및 당무위원, 자민련 부총재 겸 사무총장 등 중책을 맡았다.

박 부총재는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 12월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서경대 석좌교수, 태안박씨 종친회장 등을 맡아 활동했다.

화랑무공훈장을 비롯해 보국훈장 천수장, 통일장, 국선장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이등병에서 대장까지'를 비롯해 '군인의 길, 정치인의 길' 등이 있다.

박 부총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의 주동자로 꼽혔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20사단장으로 진압 작전에 투입됐다는 지적도 받았다.

그러면서 12·12사건과 관련해 반란중요임무종사혐의로 구속 기소됐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위원장으로 선출된 민정당 충북 보은·옥천·영동지구당 임시대회 광경.

반면, 박 부총재는 민정당 국책조정위원장과 국회 보건위원장 시절, 고향인 옥천 지역발전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먼저, 그는 대전~옥천 간 4차선 국도를 1년 만에 뚫어 도시화를 앞당겨 보은이나 영동보다 인구증가와 일자리 창출 등 지역 발전을 도모했던 인물이었다. 이 4차선 도로는 1987년 대선주자로 떠올랐던 그가 자신의 고향인 옥천에 국가예산을 한꺼번에 가져와 공사기간이 1년 밖에 걸리지 않았던 사업이었다. 또한 1987년 옥천으로 이전한 옥천조폐창 또한 그의 작품이었다. 당시 부여로 결정된 것을 옥천으로 유치해 1000여 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박 부총재의 애국심을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고등학교 재학 중 6·25 전쟁에 참전하는 등 34년의 군인 생활과 예편 후 정치권 입문 후 3선을 하면서 박부총재의 행보는 충북 정·관가 안팎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충청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민주연합에서 김종필 총재에 이어 부총재를 역임하면서 충북 정치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군인이 아니었다면 학자가 됐을 것”이라고 술회했던 박 부총재는 글쓰기, 읽기, 바둑 등을 즐겼던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품성의 소유자였다. 충북 지역 정치인들과도 사이가 원만했다.

박 부총재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혜정(78)씨와 아들 박영권(44·사업), 딸 박영애(46) 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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