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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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연후
  • 차갑부 교육학박사, 시인
  • 승인 2022.04.2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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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가을에 떨어져 쌓인 낙엽이 땅의 속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그 틈을 비집고 연한 새싹이 얼굴을 내민다. 울긋불긋 진달래가 연분홍 립스틱을 바르고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남정네들을 유혹한다. 바람은 격한 운동을 멈추고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른 봄에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나무가 많다. 산수유는 2월 말에 꽃을 피워 달포를 노란색으로 봄을 알린다. 매화․이화․도화(桃花)도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나뭇잎이 돋아나고 있지만 아직은 제 색을 감추고 있다. 자연은 함부로 잎을 들어내지 않는다. 얼마간 뜸을 들인다. 밥도 뜸을 들여야 맛이 나고 구수(九修)한 사시생이 대통령이 되었듯이 뜸을 들여야 성숙해지는 것은 세상 만물이 다 마찬가지다. 

연녹색으로 색칠을 시작하는 산에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이 과연 일품이다. 공자는 『논어』 「자한편」에서 ‘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 했다. 

날씨가 추운 겨울이 되고 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돋보인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산에 나뭇잎이 무성할 여름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사람도 어려운 시기가 와야 옥석이 가려지는 법이다.

제주도로 유배 가서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추사 김정희는 그 말에 필이 꽂혀 붓을 들어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자신의 제자인 이상적(李尙迪)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유배 간 추사 곁에는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배신하고 떠나서 아무도 없다. 힘 있으면 붙고 힘없으면 돌아서는 게 배신자의 생리다. 하지만 이상적은 불운한 추사의 곁에서 만난(萬難)을 이겨낼 수 있도록 위로해 주고 책 읽기 좋아하는 스승을 위해 중국을 오가며 희귀한 책을 구해다 주는 등 충성을 다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한연후’에 이상적의 인간 됨됨이가 ‘송백’처럼 푸르렀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는 스승은 붓을 들어 송백(松柏) 네 그루를 그렸다. 그림 속의 허술한 집 한 채가 마치 추사의 처지를 닮았다. 집의 테두리만 그린 것이 초등학생의 그림 같다. ‘세한도’는 풍경화인 것 같지만 추사 자신과 이상적의 모습을 그린 인물화다. 배신하지 않은 제자에게 내린 스승의 상(賞)이다. 스승이 손수 그린 그림을 받아든 제자는 너무 기뻐서 동네방네 자랑했다. 그 그림을 본 조선과 중국의 문인 20명이 감상문를 덧붙였다.  

사람도 ‘세한연후’에야 됨됨이가 드러난다. 평소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 구분이 잘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모든 게 평준화된다고들 말하면서 쇠약해 가고 있는 자신을 위로한다. 얼핏 듣기에는 사실 같다. 특히 외적인 면에서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젊었을 때 양귀비꽃보다 더 예쁘던 여자의 얼굴은 나이가 들면 뒷동산에 고개 숙이고 피어난 할미꽃 같고, 많던 재물도 자식들에게 다 빼앗기고 남은 게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늙었다고 모든 게 평준화됐다고 말하는 것은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헛소리다. 평준화된 게 아니라 인격의 무게가 다르다. ‘세한연후’에 진가가 드러난다는 공자의 말처럼 세월은 사람을 ‘송백’과 ‘여느 나무’를 구별해 준다. 세상 풍파를 헤치고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온 사람은 인격의 완성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공자가 언급한 ‘세한연후’의 송백은 역시 지고(至高)의 품격을 갖췄다. 다른 나무들은 이방원이 지은 ‘하여가’를 부르며 살아간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많은 나무가 서로 얽히고설켜 살아가지만 송백은 자신의 반경 내에서 다른 나무와 얽히지 않고 살아간다. 다른 나무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송백은 나무가 많은 곳에서는 위로 자라서 키가 크고 날씬하다. 다른 나뭇가지가 없는 높이에서 옆으로 가지를 친다. 생존의 법칙이요 배려의 아이콘이다. 남에게 의존하거나 힘센 자들에게 빌붙어서 기생하여 오직 ‘하여가’만 부르는 사람들과는 차별된다. 

사기 탄핵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5년 가까운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고 자유의 몸이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며칠 전 “저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이 떠나갔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듯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권력에서 밀려나면 배신하는 사람들이 많다. 단테는 『신곡(神曲)』에서 배신자를 지옥 맨 밑바닥에 두었다. 그는 배신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악 중에서 가장 밉고 더럽고 비열한 최대의 악이라고 보았다.   

권력자에게 빌붙어 권력을 향유하고 권력자가 힘이 빠지면 또 다른 권력자에게 빌붙는 찰거머리 같은 인간들이여, 주구장창 ‘하여가’만 입에 달고 살지 말고 이제 제발 레퍼토리를 바꿔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말, 조선 초기 권력 이동기에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가 지은 ‘단심가(丹心歌)’를 부르며 자신의 사람됨을 성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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