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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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63)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04.2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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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한 일본 
 
조헌이 영남지방을 주유하고 돌아온 그해 봄,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가 열 달 만에 귀국했다. 조정에서는 작년 3월에 황윤길(黃允吉)을 정사로 하고 김성일(金誠一)을 부사,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하는 통신사로 파견했다. 이는 서애(西厓) 유성용(柳成龍)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통신사가 출발할 때에 조선에 와 있던 왜 사신 평의지(平義智)도 함께 출국했고 귀국할 때에는 평조신(平調信)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이 따라 들어왔다. 그런데 현소와 평의지는 조령을 거치고 평조신은 죽령을 거쳐서 두 길로 나누어 서울로 들어온다. 그들의 목적이 침공을 위한 정탐에 있었던 것이다.

1588년 함경도 길주에 유배 중이던 조헌은 왜국과의 통호를 반대하는 청절왜사일소(請絶倭使一疏)를 올렸으나 관찰사가 이를 받지 않았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12월에 받지 않았던 제1소와 함께 제2소를 써서 함께 직접 대궐로 나아가 직소했다. 1589년에 왜 사신 귤강광이 조선에 들어와 일본에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며 공공연히 국경 침범을 운운했다. 조헌은 우리가 일본에 사절단을 보내는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 찬탈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들의 속셈이 조선침략의 야욕에 있다고 상소했다. 세 번이나 올린 청절왜사소에서 통신사 파견을 극구 반대하는 주장을 분명히 해 왔던 것이다.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이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는 무례하고 도리에 벗어났다. 사신단이 대마도에 도착하면 영접사를 파견해서 사신 일행을 안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신 일행을 곧바로 대판 성으로 안내하지 않고 먼 길을 돌아 몇 달을 지체하고서야 도착하게 했다. 대판 성에 도착해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런저런 핑계로 국서를 받지 않아서 5개월이 지체한 뒤에야 이를 전할 수 있었다.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가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연회 중에 안으로 들어가 평복을 갈아입고 어린아이를 안고 나왔다.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자 시녀에게 아이를 주고 옷을 갈아입는 태도가 태연자약하고 방약무인했다. 또한 답서를 바로 주지 않고 지체하다가 겨우 나온 답서의 내용에 말투가 거칠고 거만해서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이에 수정을 요구해서 간신히 답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답서를 들고 귀국한 사신단의 정사와 부사의 보고가 정반대였다. 서인인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의 견해는 일본의 모든 정황은 도발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고 보고했으나 동인인 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위협적이며 경망한 인사에 불과할 뿐 실제는 일본의 도발 가능성이 없다는 정반대 의견을 주장했던 것이다. 

선조 24년 3월 1일자 수정실록 기사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들어있다.

“당시 조헌이 화의를 극력 공격하면서 왜적이 기필코 침입할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윤길의 말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 모두가‘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 시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유성룡이 성일에게 말하기를‘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이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하니, 성일이 말하기를‘나도 어찌 왜적이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러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파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의 운명도 개의치 않는 것이 당시 조정의 실정이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로 인해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조정에서는 일본의 침략 의도를 놓고 갑론을박 끝에 김성일의 주장에 무게를 두는 안일한 선택을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왜 사신으로 온 평조신으로부터 1년 후에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하는 통보를 받는다. 즉 명나라를 치러 가는데 조선으로 하여금 길을 내놓으라는 황당한 통고를 받고서야 비로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발 위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전쟁을 모르고 평화를 구가해 온 조선의 관리들은 일본의 침략에 의혹을 가지면서도 명분이 없다고 단정하고 소극적인 대책으로 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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