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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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68)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06.0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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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請斬倭使疏二疏 
대궐 주춧돌에 자신의 머리를 찧다

“또 듣건대, 유구에서는 우리나라에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왜적을 섬긴다고 하였다 하니 이런 소리가 오랫동안 나돌게 된다면 어찌 명나라만이 듣지 못한다고 하겠습니까. 소정방(蘇定方)과 이적(李勣)의 군대가 동으로 쳐들어 온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의 입공(入貢)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왜놈은 천하에 공포하기를 반드시 우리나라가 저들에게 복종하여 내조(來朝)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명나라에 대한 은혜와 의리가 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놈이 어긋나는 언사를 한다면 마땅히 아침에 듣고 저녁에 알려야 합니다. 시일이 지연하여 절사(節使)가 가는 때를 기다려서 알리려 한다면 결코 명년 봄 안으로는 명경(明京)에 가지 못할 것이고 왜놈이 강석(江淅)에서 부친 격문은 반달이면 명나라 조정에 도착될 것입니다. 명나라는 은애도 간절하지만 한번 노하게 되면 죄를 내리기가 일쑤인데 만일에 우리의 힘을 양해하지 않고 왜국을 토멸하라고 하면 우리의 약한 군대로는 방위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느 남는 힘이 있어서 왜적을 정벌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신이 더욱 통탄하는 바는 신이 상경(上京)한 길이 바로 왜국 사신이 올라온 길이었습니다. 자세히 듣건대 저 왜국 사신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 거만 부리기를 명나라 칙사(勅使)와 같이 하였는데도 우리의 관리들은 한결같이 기가 죽어서 일도(一道)의 힘을 다하여 여러 가지 술과 안주로 대접하고 방비는 전혀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하옵니다. 다만 이 사신들의 왕래함을 보아도 가히 뒷날에 크게 패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바른 논의는 볼 수 없고 엉뚱한 소(疏)만 나오니 앞으로 위급할 때에도 이와 같이 앞장서서 구제하는 사람이 없다면 임금께서는 문천상(文天祥)과 육수부(陸秀夫)같이 의지할 사람이 끝내 누구이겠습니까? 정몽주(鄭夢周)는 고려왕조의 위태한 시기에 벼슬하면서 오히려 그 혐의를 피하지 않고 널리 국사(國士)를 맞아다가 담론하기를 마지않았습니다. 그 시(詩)에 이르기를 ‘자리 위에는 늘 손님이 가득하고 술동이에는 술이 떨어지지 않노라’라고 하였으니 일을 맡아 하는 신하가 문을 닫고 혼자 앉아서 중의(衆意)를 모으지 않으면서 능히 그 나라를 구한 사람은 예부터 있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신들을 세밀히 살피시고 의심이 될 만한 단서는 버리셔서 남을 헐뜯어 고하는 자들의 입을 막으시면 사직이 크게 다행할 것이옵니다.” 

조헌은 상소에서 조선이 처한 현실과 활로를 명확하게 제시했다. 첫째는 왜적의 침략에 대비한 시급한 사전 준비다. 조헌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에서도 저들의 성세에 위축될 것을 염려하여 우리가 지금부터 준비하고 지형적인 조건을 이용하면 아무리 강한 적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둘째는 명나라의 오해로 야기될 보복성 문책에 대비한 사전 조치를 제시했다.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듯이 일본의 침공보다도 명나라의 보복이 더 혹독하고 무겁다는 것이다. 

조선은 북으로는 명나라의 눈치를 보고 남으로는 점점 조여 오는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은 생존의 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것은 사대가 아니라 조선이 처한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생존의 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조헌의 혜안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심정을 가슴 저리도록 느끼게 된다. 

셋째는 왜 사신의 목을 베어 조선의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고 중국의 오해도 없애라는 것이다. 왜 사신의 위세 눌린 조정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처신하는 것이 결국은 장수(將帥)와 군사들은 물론 지방 관리와 백성들 모두가 적에 대항할 의지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더구나 일본 사신은 공격할 길을 정탐하는데 적을 방비할 준비는 하지 않고 오히려 조정에서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라고 지시하여 모두가 사신 접대에 매달리니 이 얼마나 한심한가? 조정은 물론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까지도 일본의 위세에 한껏 위축되어 있으니 온 나라의 저항 의지가 무엇보다도 시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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