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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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64)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7.2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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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매주 주말까지 남학생 전화를 받고 뛰쳐나가는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많은 감정을 느꼈다. 우리 교수가 내게 한 말이 딱 맞는 말이었나?

“교수님, 가정부를 대학에 입학시키다니요? 그럼 바람이 들어 집안 살림을 하겠어요? 나가라는 말이나 똑같네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고개를 가로저었었다. 내가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고 베풀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른이기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아이는 그 고마움을 진짜 우리 가족이 되어 더 성실하게 생활하는 것으로 갚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이는 대학 입학 전의 ‘시집 좀 남보다 일찍 갔다고 생각하면,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하는 일쯤이야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던 그 아이가 아닌, 우리 집에 사는 대학생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텅 빈 아이 방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간 고마웠고 잘 있었고, 그리고 제 길을 찾기 위해 험한 세상으로 나가보겠다….” 

뭐 그런 내용의 작별을 고하는 편지였다.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대학공부를 시킨 것이 아이를 내쫓은게 되고 말았다. 아이는 교수님으로 시작하여 교수님 호칭으로 편지를 끝냈다. 평소에는 내게 아주머니라고 하다가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면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학교로 보내왔다. 그럴 때는 언제나 교수님으로 시작해서 교수님으로 맺는 대담하고 맹랑한 아이였다. 설, 추석 명절 때면 우리 9남매와 시부모님까지 다 모이면 40명이나 되는 가족들의 음식을 혼자서 거뜬히 해내던 아이…. 

“아주머니, 여자가 음식 하나만 잘하면 남편도 꼼짝 못 하고 사랑도 받게 되고 또 남의 집을 살아도 주인이 절대로 나가라고 큰소리를 못 치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동안 음식 하는 일에 정신을 쏟아 배웠어요.”

나도 처음 듣는 세상의 이치를 그 아이는 터득하고 있던 그런 맹랑한 아이였기에, 나는 그 아이를 그냥 밥하는 일이나 시키고, 최고의 가정부로서만 나이 먹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조금의 지성이 더해지면 한 훌륭한 여성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대학공부를 하게 했다. 가정부라는 이름이 그 아이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까 하여 우리 주민등록등본에 ‘조카’로 해서 동거인으로 입적하여 누구에게나 친정 쪽 조카라고 소개하고, 여행을 가도 같이 갔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 내 곁을 훌쩍 날아가 버렸다. 그 당시 내가 석사논문을 쓰느라 정신없이 바쁘던 시기라서 한편 괘씸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월급날 되기 전에 나간 그 아이가 걱정되어 나는 무조건 그 아이 언니 집 주소로 당분간 쓸 수 있는 생활비를 우편환으로 보내 주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가정부를 구하고자 하니, 그 아이 만한 가정부는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교수 말대로 그 아이를 가정부로만 잘 대해주고 살았다면 편안하게 오랫동안 잘 지냈을 텐데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누가 봐도 어떤 사람이 들어도 나는 분명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살았다. 가정부 하겠다고 집에 들어온 아이를 대학생 만들어 날갯짓하며 떠나게 했으니….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내게 ‘겉똑똑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셨었다. 

지금까지도 그 아이를 생각하면 정답은 모르겠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세상에 이런 바보도 있답니다

결혼 후 남편의 첫 해외 출장지는 호주였다. 호주에서 돌아온 남편은 호주 특산물인 캥거루 털 점퍼를 내 선물로 사 왔다. 또 털목도리 한 개를 내놓으며 누가 선물로 하나 준 것인데 어머님께 드리 라며 무척 미안한 표정으로 장모님 것은 다음에 사다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 말에서 나는 털목도리가 선물 받은 것이 아닌, 남편이 어머님 선물로 사 온 것임을 직감했다. 친정어머니 것을 준비 못 한 것이 미안하여 그러나보다 생각했고, 결혼 후 첫 해외여행이니 아들이 어머니를 생각해서 선물 하나 챙기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때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도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는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는 밍크와 다이아몬드 제품 등은 아무리 해외가 좋고 싸더라도 필요하면 돈을 더 주고 국내에서 사도록 하자. 구태여 나라가 하지 말라는 것을 구매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고, 그 후 세계 여러 나라를 나갔어도 우리 부부는 그 약속을 지키고 살았다. 또 나는 지금까지 평생 집이란 내가 사는 아파트 한 채 외에는 투기로 더 가져본 적이 없다. 아들 둘이 있으니 아들 이름으로 아파트 하나를 사놓으라는 주위의 권유도 많았지만, 집이란 필요할 때 사서 사는 것이지 미리 애들 이름으로 사놓는 것은 아니라는 내 특유의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결혼한 후 얼마 지나서 직장을 퇴직하신 시아버지께서 폐결핵임을 알게 되었다. 병원 치료를 받고 약을 드시기는 했지만 쉽게 완치 되지 않아 시어머니께서는 식구들에게 혹시라도 전염될까 하여 무척이나 노심초사하셨다. 특히 손자를 본 후라서 그 걱정이 더 크셨다. 아버님은 서울에서 지내기보다는 공기 좋은 시골에서 지내기를 원하셨다. 남편과 나는 아버님이 원하시는 대로 공기 좋고 물 좋고 산 좋은 시골 땅을 알아보기로 했다. 나는 부동산에 그런 적당한 곳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부동산에서는 공주 유구와 경기도 시흥 쪽에 좋은 땅이 나와 있다고 연락해 왔다. 유구는 6‧25 전쟁 때 가장 깊은 피난지였던 곳으로 아주 깊은 시골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개발은 절대 되지 않을 곳이었다.

시흥 땅은 현재 과수원으로 한적하게 지낼 곳이지만 수년이 지나면 상가지역으로 전환되어 개발될 구역이라 투자가치가 크다고 소개했다. 양쪽 땅 값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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