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밀사’ 김규흥 장군 옥천서 다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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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밀사’ 김규흥 장군 옥천서 다시 태어나다
  • 이태현기자
  • 승인 2016.08.1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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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10월 업적 재조명 위한 대규모 학술대회 개최
옥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규홍(1872∼1936)선생이 신해혁명에 참여했을 당시의 모습

옥천 출신 독립운동 대부인 범재 김규흥(1872∼1936) 장군의 업적이 광복 71주년을 맞아 재조명 될 전망이다. 그동안 지역에서는 고종의 밀사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실상은 중국 내 항일 무장 투쟁의 선봉이었던 사실이 속속 확인 됐다.

김규흥 장군은 100년 전 중국 신해혁명 당시 지도부로 활약한 조선인 이었다. 광둥 지역에서 혁명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인 그는 청나라 군인을 대상으로 혁명을 알리고 혁명에 가담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다. 비밀을 요하는 임무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규흥 장군은 김복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일제 기밀문서에 숱하게 등장하지만 우리 역사책에선 찾아볼 수 없다. 1872년 옥천에서 태어난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로 자강운동과 애국계몽 운동에 나서 1906년 옥천에 창명학교(지금의 옥천 죽향초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1908년 초 광둥으로 무대를 옮기고 본격적인 혁명 활동에 나섰다. 또, 중국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광둥 혁명활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추노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규흥은 워낙 성실했기 때문에 비밀문건을 보관하거나 전달하는 것은 모두 그를 통할 정도였다. 이런 공로로 그는 광둥지역에 혁명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13년 초 광둥 호군사서 고문원에 임명됐다. 군부 서열 2, 3위에 해당하는 자리다.

김규흥 장군은 이후 독자적으로 활동하다 1936년 텐진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규흥 장군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잠들어있다. 최근 선생의 중국 내 활동이 학계와 언론을 중심으로 새롭게 주목받으면서 옥천문화원과 김규흥 선생 기념사업회, 옥천군이 공동으로 선생의 삶을 재조명하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오는 10월 15일 충북도립대학 미래관에서 김규흥 선생의 업적을 분석하는 제1회 범재 김규흥 선생 학술대회가 열린다. 이 학술대회에는 충북대 박걸순 교수, 충남대 김상기 교수, 신라대 배경한 교수, 독립기념관 김형목 연구원, 안동대 김희곤 교수 등이 참석해 선생의 발자취를 조명한다.

옥천에서 김규흥 선생과 관련된 학술대회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옥천이 고향이었지만 사실상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던 김규흥 장군의 기념사업회 역시 최근 옥천으로 주소를 옮겼다. 옥천문화원 관계자는 “10월 학술대회를 계기로 옥천에서 김규흥 선생을 기리는 세미나와 포럼을 정기적으로 열고, 평전 발간과 중국의 활동 근거지인 연변지역 사학자들과의 교류도 활발히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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