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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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86)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10.2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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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1차 기병의 실패와 보은 차령전투
 
임진년(壬辰年, 선조 25년) 5월 3일. 청주에서 이우(李瑀), 이봉(李逢), 김경백(金敬伯) 등이 조헌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선생의 문인들이다. 선유동(仙遊洞)으로 어머니를 급히 피난시킨 조헌이 그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모두가 왜적에게 짓밟히고 있는 강토와 백성들이 겪는 수난에 분개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적의 기세가 등등한데 이를 막아야 할 관군은 겁을 먹고 도주하기에 급급하고 임금마저도 도성을 버리고 북으로 몽진했다는 소식은 더욱 암울하기만 했다. 

조헌 선생과 그의 문인들은 의병을 모아서 근왕(勤王)을 도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밤을 새워가며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檄文)을 작성해서 요로에 보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쟁을 겪지 않고 평화를 누려온 백성들에게는 아직도 절박한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였고 의병이라는 의미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은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한 채 의병을 모집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청주에서 왜적을 토벌하려고 1차 기병을 도모하던 당시의 전황은, 중로(中路)로 북상 중인 고니시의 제1군이 4월 19일 상주에 도착했다. 상주에는 목사 김해(金澥)와 군관들이 모두 산속으로 달아나고 아무런 방비도 없는 상태였다. 중로 방어 임무를 부여받은 순변사 이일이 한성에서 출발하여 4월 24일에 겨우 상주에 도착했으나 이마저도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28일에는 마지막 기대였던 삼도순변사 신립(申砬)도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했다. 

한편, 서로(西路)를 공격하는 구로다의 3군은 창녕에서 두 개 제대로 나누어서 28일에 추풍령에 진출한 후에 다시 합류한다. 추풍령을 넘은 왜적은 도로를 따라 청주에 진입하고 이어서 별 저항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한성까지 이르렀다. 조헌이 청주에서부터 첫 기병 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왜적이 충청좌도 지역을 지나 한성에 도착한 바로 그 시기였다.

5월 중순, 청주에서 의병모집에 실패한 조헌은 다시 옥천으로 내려온다. 조헌이 기거하는 안읍 후율정사(後栗精舍)에 전승업(全承業), 김절(金節), 김약(金籥), 이우(李瑀), 전충남(全忠男) 등 그의 문인들이 모였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왜적의 거센 기세와 이에 전혀 대응못하고 조선군의 실정 등 전반적인 전황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북으로 몽진을 했으니 나라의 운명이 매우 위급했다. 

청주에서 기병에 실패한 경험으로는 당장 대규모의 의병을 모집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조헌은 우선 인근 지역의 왜적부터 소탕하기로 뜻을 세웠다. 그 공격 지점을 왜적 제3군의 후방 증원 및 보급로 상에 있는 보은 차령(車嶺 일명 수리치)으로 잡았다. 이 길은 보은에서 회인현(懷仁縣)을 지나 청주로 이어진다. 청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험한 지형의 요충지가 차령이었다. 이 길은 적의 주력이 북상한 후 후속부대와 지원 병력의 이동이 빈번한 통로였다. 이 험한 지형을 이용하면 큰 손실을 입지 않고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우선 인근 지역에서 향병을 모으는 일이 시급했다. 문인들이 앞장서서 각 지역으로 나아가 중봉 선생이 우리 향토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향병을 모집한다는 뜻을 널리 알렸다. 이때에 전승업의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이후에 그의 제자인 진사 남익명(南益明)이 쓴 전승업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선생(전승업)은 미리 군복 100여 벌을 만들고 두었고 이때를 당하여 노비 100여 명을 내었으며 또 어려운 중에도 집안에 있는 벼와 잡곡 100여 섬을 수습하여 먼저 군량미로 쓰게 했다. 또, 식량을 모은다는 격문을 청산과 영동지방에 전하고 중봉을 의병장으로 추대했으며 선생(전승업)은 막중의 소임을 맡아 일에 따라 주선하였으며 충성과 정성을 다하기로 하였다”

전승업은 조헌 선생의 적극적인 지원자였지만 그의 유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차령 전투를 준비하는 데에도 많은 공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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