댑싸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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댑싸리비
  • 이기호 시인·수필가
  • 승인 2019.12.1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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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시인·수필가

“개나리, 보따리, 댑싸리, 소쿠리, 유리 항아리” 라는 동요를 기억하시나요? 그 노래 속의 댑싸리가 우리 집 뒷마당에 살았습니다.

처음엔 작달막한 것이 여름을 지나면서 깻송이같이 마른 몸에 키만 멀대같이 크던 나만큼 자랐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작은 건 뿌리째 뽑으시고 제법 굵은 건 톱으로 잘라 뒷마당엔 베어 낸 댑싸리들이 그들먹하게 쌓여 제법 굵고 보얀 허리를 드러내놓고 물기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빗자루로서의 또 다른 삶을 위해 보아스 타작마당의 룻처럼 누워 있던 것입니다.

봄에는 호드기 만든다고 여기저기 떨어뜨려 놓은 버들잎과 솜병아리가 물고 가던 개나리 꽃잎을 쓸었고, 긴 여름날에는 아낙네들에게 어스름 저녁때를 알려주던 분꽃을 담아내었습니다. 아이들의 잠텃이 늘어져 해가 중천까지 떠도 일어나지 않으면 또또따따 나팔 불어대다 이운 나팔꽃도 비질하였습니다. 아기가 넘어졌을 때 정강이에 붙어 피인 줄 알고 울음을 내놓았다는 장미꽃도, 보리가을하는 보리바심 마당도 정갈하게 만들었습니다. 빗자루 끝에서 사그라든 모깃불 재와 옥수수 괴끼, 사탕수숫대와 참외 껍질과 토마토 꼭지들이 쓸려 나갔습니다.

가을엔 대부인 마누라도 부지깽이도 덤벙인다지요. 추수하려 마당 백질 해놓은 뒷마당과 낟가리 밑으로 떨어진 이삭들이 댑싸리비 아래 놓였습니다. 홀태에 훑은 벼를 멍석에 널어놓으면 아이들이 고무래로 젓다가 흘리기도 하였죠. 그러면 댑싸리비가 또 잔발 같은 몸을 꿈지럭거렸고 도리깨질 끝난 콩알과 콩깎지도 걱실걱실한 댑싸리비가 앞장서서 처리하였습니다. 구멍 속에 들어가 있던 콩알 기억나시나요, 그때의 추억이 그리운 이들이 골프를 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또 꽈리 만든다고 어질러놓은 꽈리껍질을 볼 때는 그도 우리처럼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거예요

이렇게 일이 많은 댑싸리비는 슬펐습니다. 친구도 어느 집으로 머슴살이 갔는지 알 수 없고 늦도록 일한 날은 몸살로 앓기도 했고요. 일하기 위해 태어났어도 막상 닥치면 불평이 생기는 세상 이치를 그도 알았지만 그렇다 해도 놀 수 없는 게 또 그의 운명이었지요. 그의 손이 가면 다시 토방의 흙먼지도 새댁이 들랑거리는 고샅도 말끔해졌습니다. 아궁이 앞과 불티 앉은 부뚜막 탑새기 내려앉은 개수통 옆도 훤하였습니다. 아궁이 쓸면서 화상 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댑싸리비의 속을 모르듯 천지에 야속한 하얀 겨울이 왔습니다. 어린애들이 탄성을 지를 때  늙은 댑싸리비는 비루먹은 말 같고 머리도 다 빠져 비사리춤이 되어 있었지요. 다행히 한 자 가까이 되는 눈은 거방진 대나무 빗자루가, 토방의 눈은 수수비가, 언틀먼틀한 부엌바닥은 싸리비가 대신하여 댑싸리비는 샘가의 눈과 장독대 눈 치우는데 쓰였습니다. 대비가 돼지우릿간 지붕과 눈 무게에 기울어진 헛간 지붕 눈을 치우는 동안 그는 저를 베어냈던 그루터기 걸터듬다가 기어이 눈물방울을 매달았습니다.

이렇게 몸뚱이만 남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몽당비라고 불렀습니다. 모지라진 붓, 솔, 치마와 연필 등도 모두 친구가 되어 서로 토닥이며 이야기꽃을 피웠을 듯해요.

세상에 슬픔은 끝이 없었지요. 수를 다하면 사람도 더러 火葬하듯이 이 몽당비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그러나 아궁이에 들어갔다가 나온 비가 없으니 어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친구 빗자루가 애석해하면서 그의 일을 대신 하였습니다. 그 친구도 언젠가는 아궁이 속으로 들어갈 것을 알겠지요. 마치 사람이 죽은 사람을 보며 언젠가의 죽음을 생각하듯이요. 그러면서도 빗자루나 사람이나 죽지 않을 듯이 살아가고 있으니 한갓 빗자루라고 내려다볼 것이 있겠습니까.

타고 남은 재가 댑싸리 베어냈던 아랫동아리에 부어졌지요. 이웃과 울타리문제로 말썽이 난 뒤 가시울타리가 쳐져 움이 자라지 못할 것도 같았습니다. 그때 댑싸리비가 남몰래 흘렸던 눈물과 재를 거름으로 댑싸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떡잎을 피워냈습니다. 잔가지를 키우며 구메구메 남모르게 틈틈이

연록색의 작은 꽃을 열어 보였습니다. 가시에 찔리면서도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꿈을 잃지 않았던 거지요. 벌과 나비도 내려와 앉은 민들레 꽃씨도 먼발치로 볼 수 있었습니다. 종달새 우짖는 늦봄이 지나가고 고추에 매운 맛 드는 늦여름이 지나가면 마이더스 손을 가진 우리 아버지는 또 댑싸리비를 만드셨을 거예요.

이제 나는 댑싸리비가 힘없을 때 도와주었던 대나무 빗자루도, 수수비도 싸리비도 갖고 싶지만 우리들의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간 댑싸리비를 찾고자 합니다. 약은 구석이라고는 없이 자살부레하여 쉽게 눈에 들어올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뒷마당으로 슬며시 찾아가 봄바람에 떨어진 꽃잎과 가을 뜨락의 뒹구는 낙엽과 눈설레 흩날려 하얘진 마당을 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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