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또 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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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또 올래
  • 한정순 수필가
  • 승인 2019.11.1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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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순 수필가

“그래, 언제 또 올래?”

고래실을 지나 동구 밖 산모롱이를 돌아설 때까지 뒤돌아보는 내게 어서 가라고 손사래 치시던 할아버지의 말씀이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하얀 바지저고리만 허수아비처럼 지팡이에 의지하여 서 계시던 할아버지. 그분과의 이별도 어언 반세기가 되어간다.

할아버지는 두 아들과 며느리를 앞세우시고 그 명을 이어받으셨는지 구십 세까지 사셨다. 아픈 상처를 가슴에 묻어둔 채 그 당시의 어른으로는 오래 사신 편이다. 그래도 귀만 좀 어두우셨지 정정하셨다. 아비 어미 잃은 둘째 아들의 막내딸인 내가 손톱 밑에 든 가시 같아서 쉽게 돌아서지 못하시고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내 모습이 사라지기까지 배웅하시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떠나려는 내게 쌈지 속 깊이 간직했던 꼬깃꼬깃한 지전 하나를 손에 쥐여 주시고 “몸 성히 잘 가거라. 언제 또 올래.” 하시며 다음 말을 잇지 못하셨다. 마른 침을 삼키며 말이 아닌 가슴으로, 무언의 표현으로, 끝내 젖어드는 눈시울로 안타까움을 감추시던 할아버지셨다.

그 어른께서는 자식들 앞세운 답답한 심사를 털어내기라도 하듯, 추운 겨울에도 사랑방 쪽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응시하며 장죽에 봉지 담배를 꾹꾹 눌러 담아 부싯돌로 불을 붙이곤 하셨다.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뿜는 연기 속에는 신음 같은 한숨이 저절로 묻어 나왔고, 때론 생담배를 태우며 깊은 상념에 잠기기도 하셨다. 무료하다 싶으면 사랑방에 홀로 앉아서 거문고를 뜯으며 시조를 읊거나, 골패를 굴리며 시름을 잊고자 애쓰셨다. 남아선호사상이 투철하던 시절, 2남 2녀 중 두 아들과 며느리를 모두 잃었으니 그 심중이 오죽이나 허허로우셨겠는가.
그 시절 나는 서울에 살면서 명절 때면 두 오빠와 함께 할아버지가 계시는 큰댁으로 내려갔다.

사랑에 들러 할아버지께 큰절하고 나면, 언제나 내게는 오빠들을 제쳐놓고 할아버지와의 겸상이 주어지곤 했다. 할아버지 상에는 색다른 반찬이 한두 가지는 늘 있었다. 맛있는 반찬을 내 앞으로 밀어 놓으시며 어서 먹으라고 손짓으로 말씀하시던 할아버지. 쇠죽 쑨 아궁이에 고구마나 감자를 묻었다가 주시기도 했고, 돌같이 딱딱하게 마른 밤을 넌지시 쥐어주며 “입에 넣어라.” 하시기도 했다. 엄격하신 할아버지셨지만, 내겐 유난히 따뜻한 사랑을 베푸시던 분이시다.

날개 잃은 새끼 비둘기 같은 어린 손녀가 아려서 그리하셨으리라.

그런 할아버지께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는 나다. 고작해야 놋요강을 개울에 가지고 가서 고운 모래를 넣어 짚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닦아 드린 것 몇 번이 전부다. 속내의 한 벌 못 사드린 철부지였다.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살아온 나로서는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를 보았고, 어렴풋이나마 뿌리에 대한 애착을 가슴에 새겼음인지, 스산한 심사일 때는 담배냄새로 찌들었던 할아버지의 사랑방 따뜻하던 온돌이 더욱 그리웠다. 도시생활이 힘들고 지칠 때면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던 고향의 사랑방, 그리고 할아버지. 스물두 살 되던 해 설에도 떠나려는 내 손을 잡고 “언제 또 올래?” 하시더니 그 말씀이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마지막 말씀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똑같이 아들에게 “언제 또 올래?” 한다.

미국에 이민간 지 십 년에 두 번째 귀국했다가 돌아가는 등에다 대고 던진 말이다. 연세 높으셨던 할아버지의 심정이 지금의 내 마음과 흡사했으리란 생각을 하면서 기약할 수 없는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 어머니가 오시면 되잖아요.” 하며 말끝을 줄이던 아들. 하기야 쉽게 오고 갈 수 없는 지구 반대편이 아니던가.

벼르고 별러 귀국한 십일 간의 만남. 인터넷으로, 전화로 미리 약속된 일정 속에는 정작 어미와의 시간은 없었다. 그저, 올 때 한 번, 갈 때 한 번 넓은 가슴으로 안아주며 “건강하게 잘 계세요.” 하던 말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하면 한없이 서운할 일이다. 그런데 왜 이해가 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마음에 없는 말을 듣기 좋게 할 줄을 모른다. 해서 내 이야기는 언제나 무덤덤하다. 그저 늦게 들어와 내 방으로 들어온 아들에게는 피곤한데 어서 건너가 자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아침 먹고 나가면 밤늦게야 돌아오는 아들에게는 맛있는 것 해 먹일 시간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들도 서운했을지 모르겠다. 어미라고 힘들고 어려울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했나, 빈말일지라도 듣기 좋게 할 줄을 아나, 그 흔하디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 해본 내가 아니던가. 피차가 서운했던 감정마저 가슴에 묻어두는 데만 익숙했지 단 한 번도 속내를 털어놓지 못했던 사이가 아니던가.

한 달 먼저 와 있던 며느리와 손자 손녀에게는 먹고 싶다는 것 해 먹이기도 했고, 구경도 데리고 다녔건만 정작 아들에게는 시간 없다는 핑계로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는 등 뒤에서 “언제 또 올래.”만 외치는 어미다.

그래도 서운한 기색 없이 떠나던 아들. “할머니, 할머니 우리 할머니” 노래를 부르던 손자와 손녀, 땀내 나는 시어미 품으로 파고들며 “나는 어머니가 좋아요.” 하며 꼭 끌어안아 주던 예쁜 며느리. 행복했던 순간들. 그들이 다 떠나던 공항에서 또다시 허허로움을 안고 할아버지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이 아들의 생일이다. 전화라도 걸어야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언제 또 올래?” 하고 철없는 소리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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