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
상태바
성선설
  • 김병학 편집국장, 언론학박사
  • 승인 2021.03.11 13: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린아이가 냇가로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 그 아이가 내 아이가 됐든 남의 아이가 됐든 일단은 달려가 구하려 든다.

이는 그 아이의 부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남으로부터 비난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도 아니다.

그저 인간이라는 본성이 자신도 모르게 작용한 결과다.

이를 두고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노력만 하면 그 본성을 회복(발전)할 수 있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그냥 방치하거나 외면한다면 아무리 선한 마음이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악을 향해 치닫게 된다고도 했다.

그래서일까, 맹자는 이러한 인간의 마음에 바탕이 되는 요건으로 ‘인(仁)’ ‘의(義)’ ‘예(禮)’ ‘ 지(智)’ 네가지를 강조했다.

먼저,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인’을 들었으며 악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으로 ‘의’를, 양보하는 마음을 ‘예’ 그리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마음으로 ‘지’를 들었다.

즉, 맹자가 강조하는 ‘인’ ‘의’ ‘예’ ‘지’ 이 네가지만 마음 속에 새기고 살아간다면 아무리 험하고 악한 세상이라도 다툼이 사라지고 ‘내 것’ ‘네 것’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들 모습을 보면 맹자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마치 외계에서나 통용될법한 단어가 되고 말았다.

환언컨대, 요즘같은 세상에 ‘성선설’은 무슨 뚱딴지 같은 성선설이며 ‘인의예지’는 또 무슨 말이냐,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그런 고리타분한 말을 하느냐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건 아무리 시대가 디지털시대이고 이기주의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 ‘인의예지’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유는, 우리는 동물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며 개나 돼지가 거리를 활보하고 정치를 하는 동물의 세계가 아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돈이라면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필요없다.

언제든지 때리고 부수고 살인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참으로 서글픈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악랄하고 부도덕한 사람이라도 분명 그들에게도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다.

즉, 누군가는 자신과 직간접적인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위해를 가한다 해도 마음 속에는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본연의 선한 마음이 내재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간 본연의 심성을 애써 거부하려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횡행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때 진정 ‘성선설’은 거부되고 있는 것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