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버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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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버무리
  • 김정자 수필가
  • 승인 2021.05.27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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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어둠이 내린다. 희미한 불빛 속에 하루의 일을 마무리하며 책상 앞에 앉는다. 감미롭고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건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리움이 사무쳐 온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엄마는 굽은 손 펼 새도 없이 반쯤은 구부러진 허리로 텃밭 고랑에서 하루해를 보냈다. 집에 올 때면 연한 쑥을 한 소쿠리 뜯어서 해 잡는 걸음으로 왔다. 엄마는 연한 쑥을 밀가루에 섞어 소금 간을 하고 사카린 넣어 단맛을 내어 쪄낸 쑥버무리로 배를 불리기도 했다.

그때 쑥버무리는 가족의 주식이 되고 간식이 되어줬다. 빙 둘러앉아 억지로 먹을 때가 많았지만 식구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어떤 날은 쑥버무리가 먹기 싫어 슬며시 집을 나와 뒷동산에 올라가기도 했다. 뒷동산 주변에는 파란 풀잎에 연하고 하얀 속살이 들어 있는 삐기를 뜯어 먹으면서 잔디에 누워 엄마가 부를 때까지 기다린 때도 많았다.

한참을 있어도 엄마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지게를 지고 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움에 달려가면 아버지는 나를 덥석 안아서 지게 위에 올려놓고 집으로 오셨다. 아버지 등 뒤에서 맡아보는 풀잎 향기와 지게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봄나물은 배고픔을 잊게 했다.

엄마는 들에 일하러 갈 때도 쑥버무리를 소쿠리에 담아 가서 논두렁에 앉아 새참으로 먹고 그 소쿠리에 다시 쑥을 한 소쿠리씩 뜯어 담아오곤 하셨다. 엄마는 해마다 봄이 되면 쑥을 뜯어 쑥버무리의 맛을 냈지만 나는 그 맛을 느끼지 못하고 투정만 부렸었다. 요즘 들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어 보고서야 엄마의 거친 손맛을 그리워하게 됐다.

오늘은 아침부터 찌푸린 날씨에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다. 괜스레 맘이 뒤숭숭해서 집을 나와 복잡한 도시를 벗어난다. 차가 멈춘 곳은 어릴 적 같이 놀던 고향 친구네 밭이다. 밭고랑 사이에는 쑥이 군데군데 자라고 있다. 지금 뜯기엔 조금 여리지만 정성껏 한 소쿠리쯤 뜯었다. 여린 쑥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마음은 조금 전과는 영 다르다. 봄기운 가득한 저녁상을 차릴 생각에 설렌다. 쑥 부침 거리를 만들고 조금 남은 쑥은 쌀뜨물에 된장을 연하게 풀어 쑥국을 끓이니 구수하고 향긋한 저녁 밥상이 됐다.

쑥 부침과 쑥국을 먹고 보니 옛날 엄마의 손맛 쑥버무리가 생각나 며칠 후 다시 쑥을 뜯으러 갔더니 저번보다 훨씬 크게 자라있었다. 그래선지 조금만 나와도 쑥 나왔다고 하고 쑥쑥 자라서 쑥이라고 했나 보다. 엄마의 손맛을 흉내 내기 위해 밀가루에 설탕으로 단맛을 내고 찜통에 쪘다. 접시에 담아놓고 가까이 사는 친구를 불렀다. 맛있게 먹어야 할 친구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다. 요즘처럼 맛있는 것들이 많을 때 밀가루와 설탕으로 버무려 쪄낸 것이 입에 맞지 않았나 보다. 더군다나 쌀이 아닌 밀가루로 만든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남편은 그 맛을 알겠지, 생각하며 식탁에 올려놓고 남편을 기다렸다. 하지만 남편은 이게 뭐냐고 하면서 좀처럼 먹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먹지 않는 쑥버무리는 식탁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다음날 이걸 어찌할까 고민 끝에 프라이팬에 기름을 넣고 튀김가루를 입혀 튀겨냈다. 그러자 바삭거리고 고소한 쑥버무리로 변신했다. 한결 맛도 있고 양도 많아졌다. 남편에게 주스 한잔과 함께 갖다 줬더니 살찐다며 튀긴 음식은 안 먹는다고 한다.

예전에 엄마는 없어서 못 먹고 자식들 배만 불려 주셨는데 지금은 주변에 갖은 음식들이 즐비하기에 맛이 어떻고 소화가 안 돼서 안 먹는다고 한다. 내가 엄마의 맛깔스러운 손맛도 모르고 안 먹겠다고 투정했던 것처럼 지금 남편이나 친구가 그 맛도 모르고 안 먹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한다.

철없던 어린 시절 쑥버무리를 먹지 않겠다고 집을 나간 나를 보고 엄마는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그때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다시 남아 있는 쑥을 들고 떡집으로 향했다. 밀가루가 아닌 쌀가루를 넣어 쑥버무리를 만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쑥버무리가 너무나 맛있어서 혼자 먹기는 아까워 똑같이 나눠 잘 포장해서 친구에게 가져다줬다. 사실 쑥버무리에 비해 복잡한 도로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나눔의 기쁨이 더 크기에 복잡한 도로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쑥버무리를 맛있게 먹었다는 전화가 계속 온다.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눠 먹는 즐거움이 바쁘게 시간에 쫓기며 사는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듯했다. 나는 오늘도 쑥버무리 먹던 추억의 힘으로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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