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4세로 별세한 고(故) 이찬규씨의 유가족이 지난달 11일 옥천군새마을협의회와 군북면새마을회에 각각 100만원씩, 모두 200만원의 성금을 전달했다. 고인의 아들 이승우(52) 옥천군 체육사업소 체육팀 주무관이 평생 새마을지도자로 살아온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군대에 다니시는 줄 알았습니다. 삽을 들고 뛰어다니고 새벽부터 마을을 쓸고 현장을 돌아보셨으니까요.”
이 주무관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마을 안에 있었다. 집 안보다 마을 곳곳에 더 오래 머물렀고 가족 곁보다 주민들 사이에 더 자주 서 있었다. 어린 아들 눈에는 그 모습이 낯설었지만 세월이 지나서야 알았다. 아버지가 든 삽 한 자루가 군북면과 옥천의 오늘을 만드는데 소중한 일조를 했다는 것을.
이찬규씨는 1971년부터 새마을지도자로 활동을 시작해 군북면새마을협의회 초대 회장 및 옥천군 새마을운동 지회장을 맡아 40여 년간 지역 봉사와 주민 화합, 환경 정비, 농가 소득 증대에 앞장섰다. 부추 작목반 보급으로 농촌 소득 기반도 넓혔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두 차례의 대통령 훈장을 수훈했다. 가족에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과 상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의 활동은 새마을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이찬규씨는 1991년 제1대 옥천군의원과 제2대 옥천군의회 후반기 부의장을 지내며 주민 권익 향상과 지역 현안 해결에도 힘을 보탰다. 대청댐 문제와 그린벨트 해제 같은 굵직한 사안에도 나서며 군북면과 옥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주무관은 “부친의 군의원 시절은 봉사하는 자리였다”며 “가족에겐 희생이었지만 아버지는 지역 일을 가족 일처럼 여기셨다”고 밝혔다.
아버지의 삶이 또렷이 다가온 건 발인 날이었다. 운구 차량이 시골집을 들른 뒤 마을을 빠져나갈 때 아흔을 바라보는 동네 어르신들이 지팡이를 짚고 도로가에 섰다. 손을 흔드는 이도,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참 잘 사셨구나. 마지막 길에 동네 분들이 그렇게 울어주시니 그게 아버지 인생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이 주무관에게 아버지는 엄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밖에서는 낙천적이었지만 집에서는 사람의 됨됨이부터 가르쳤다. “아버지는 늘 지식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공부보다 예의를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죠.”
이 주무관은 아버지를 휴대전화에 ‘존경하는 아버지’로 저장해 두었다. 흔한 호칭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정말 존경하는 분이셨다”며 “희생과 봉사를 가장 가까이서 보여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이 주무관의 나눔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13년 군북면에서 근무하던 시절,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수급 대상에서 빠졌지만 정작 도움받을 곳이 없던 한 어르신을 만났다. 그 일이 계기가 됐다. 이후 10여 년간 매년 200만 원 가량을 지역에 기탁해 왔다.
쉽게 마련한 돈은 아니었다. 그는 매달 용돈 10만원을 따로 모아 상반기에 100만 원, 하반기에 다시 100만 원을 만들었고 보너스 받은 달엔 조금 더 보탰다. “돈 많을 때 봉사하겠다는 말은 쉽습니다. 진짜 봉사는 박봉에서 10만 원, 20만 원을 떼는 겁니다. 할머니들이 성금 만원 내는 게 큰마음이잖아요. 그 마음을 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그 마음은 두 아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기준이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함께한 건 평범한 식사 자리였다. 어린이날에 아버지를 모시고 밥을 먹었고 다음 날에도 같이 먹었다. 아버지는 “피곤하니 한숨 자야겠다”고 했고 그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 주무관은 “어르신들은 호상이라지만 자식에게 부모의 죽음이 어찌 호상이겠습니까”라며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이어 “자식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그렇게 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찬규씨의 삶은 한 줄 이력으로만 남지 않는다. 새벽 골목을 쓸던 손과 마을 일을 먼저 챙기던 발걸음은 이제 유가족의 나눔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버지가 지켜온 새마을 정신이 아들의 손에서 봉사로 이어진 것이다. 이 주무관은 “아버지의 봉사 정신이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며 “저도 아버지처럼 꾸준히 봉사하며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