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은 태어난 생년월일시로 운명을 예측하는 학문이다. 조선 시대 때는 과거 시험 잡과에서 관리직으로 명리학자를 뽑았다. ‘명과학자’라고 해서 왕실과 관련된 일을 예측 하다 보니 위험한 직업이었다. 조선 말기에 서양 문화가 들어오면서 명리학은 미신으로 치부되고 재야(在野)의 학문으로 밀려났다. 그 후 명리학은 지금까지 민속 문화로 민간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사주가 인생을 휘두를 정도로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은 태어난 생년월일시와 상관없이 자기 의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다. 현대인에게 명리학은 재미있는 운명 풀이 정도로만 사용된다.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라는 기호로 성격과 기질을 아는 정도이다. 그런데 성격은 운명의 중요한 근원이다.
명리학을 객관적 진리로 믿으면 안 된다. 명리학은 하나의 예측이다. 예측은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사주는 맞추는 게 아니다. 사주는 피상담자에게 ‘자기 삶’에 대한 낙관적 관점을 세워주는 해석학이다. 자기 기질과 성격을 사주에 근거해서 알려주고 갈등 상황에서 더 나은 쪽을 선택하도록 도움을 주는 게 사주이다. 사주를 보면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단점은 고치고 장점은 더 발전시켜서 자기를 계발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면 된다.
사주를 주체적으로 이용하면 좋다. ‘내’ 삶을 사회적으로 합리화하고 자아의 욕망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명리학은 자기를 수양하고 할 수 없는 일을 포기하는 운명론이다. 사주로 자기를 다스리고 ‘상대적으로 남과 비교하는 사회’에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명분을 찾는 게 명리학이다. ‘내’가 이렇게 사는 건 사주팔자구나 하며 체념도 하고 자기 한계를 알 수 있는 철학으로 사주학을 이용하면 된다.
누구는 돈이 있는데 왜 ‘나’는 돈이 없냐. 누구는 배우자 복이 있는데 왜 ‘나’는 배우자 복이 없냐 하는 걸로 자기를 괴롭히면 안 된다. 없으면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운명으로 사주팔자를 이용하면 좋다. 사주팔자는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자기 위안이나 자족하는 근거가 되어준다.
명리학의 용도는 자기 장점과 기질을 미리 알면,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직업을 구하고 자기 재능을 일찍 발견하여 개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기 성격이 강하면 자기 성격을 절제하는 연습을 하고 자기 체력이 약하면 운동하고 체력을 기르는 방향으로 명리학을 이용하면 된다. 사주팔자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자연의 흐름이다. ‘내’가 사주에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운명론이 아니다.
명리학은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부정적 운에서는 더 조심하고 더 잘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키우는 쪽으로 해석한다. 사주팔자는 필연이 아니다. 현실의 삶은 필연과 우연과 자기 의지가 작용해서 움직이는 복합적이고 복잡한 것이다. 실제 삶은 사주의 음양오행 이론처럼 단순하지 않다.
사주학을 공부하면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상황과 의지와 관계에 따라 변한다.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때가 되면 죽는다는 거’, 이것만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진리이다. 실제로 운명(運命)은 ‘명(命)이 변한다. 명(命)이 움직인다’라는 의미이다. 사주로 인간의 운명을 필연인 양 말하는 건 모순이다. 명리학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 복을 예측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건강복, 재물복, 직업복, 결혼복, 학업복, 인복(人福) 등 온갖 복을 좋게 예견하기 위해 사용하면 된다.
사주학을 미신이나 점술처럼 믿으면 안 된다. 사주학을 자기 삶의 지침서 정도로 알고 있으면 된다. 과학으로 증명된 학문도 새로운 지식이 발견되면 깨지는데 매 순간 자연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사주팔자를 진짜로 믿으면 안 된다. 명리학은 신(神)도 아니고 점(占)도 아니다. 명리학은 개인이 태어난 날의 자연 기호로 인간을 이해하는 자연학이다. 사람의 삶을 자연에 빗대어서 설명하고 자연의 이치를 말하는 게 명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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