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41)-옥천군수 박춘무 의병장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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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수(41)-옥천군수 박춘무 의병장 ②
  • 전순표 국사편찬위원회 충북 부회장(사료조사위원)
  • 승인 2026.02.12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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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당 박춘무 의병장은 임진왜란 개전 초기 청주(淸州) 복대리에서 7백명의 의병을 일으켜 1592년 8월에 청주성을 탈환 이후
호서좌의대장이 되어 금강 이북을 방어하는 의병장이 되었다. 조헌 의병장은 금강 이남을 방어하는 호서우의대장이 되었다.


청주성 탈환 공훈, 옥천군수 발탁

특히 청주 출신 박춘무 의병장은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8월에 청주성을 탈환하고 진천 전투까지 승리한 맹장이다. 이 같은 공훈으로 후에 임진왜란 중에 옥천군수에 발탁되었다. 옥천군은 이원면 원동리 금강 상류의 적등진 등 충청도 청주목에서 영남대로와 충청대로를 잇는 교통의 요로에 있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전투 경험이 많은 이봉, 박춘무, 이축 의병장을 옥천군수로 임명하여 배치했다.


구로다 왜군, 북진 청주점령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침입한 왜적은 거침없는 파죽지세로 밀어닥쳐 보름 만에 소백산맥과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동남부의 청산현, 황간현을 점령하였다, 5월 2일에는 추풍령-황간-청산-보은을 점령했다. 그때 중봉 조헌 의병장은 보은 수한면 동정리와 회인현 사이 수리티재 고산지대에서 매복산악전으로 왜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회인을 거쳐 피반령을 넘어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충청대로를 따라 진천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했다.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김해 부근에 상륙하여 경상서로-추풍령-보은-청주-진천-수원에 이르는 루트를 따라 북진하여 한양에 입성하였다. 왜장 구로다는 추풍령을 넘어 황간을 거쳐 보은과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일부 왜군을 청주성에 주둔시켜서 충청좌도와 주변부를 장악하게 했다. 이 때문에 그해 8월 초까지 석달 동안 청주지방은 왜군의 점령지가 되었다.


청주 부모산 의병훈련, 7월초 출정식

왜군에게 청주의 관군이 무너지기 전인 4월부터 청주의 박춘무 의병장은 청주지방 주변부 곳곳에 의병모집 격문을 띄우며 종사관 한혁(韓赫)을 시켜 여러 군과 현에 보냈다. 청주지방 등 곳곳에서 의병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700여 명이 되었다. 이에 박 의병장은 이시발(李時發)과 함께 청주시 남부 비하동 소재 부모산에서 의병들과 함께 진용을 갖추며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 후 7월 4일 청주 서쪽 무심천 건너 복대동에서 아들 박동명(朴東命)과 아우 박춘번(朴春蕃)을 앞세워 1천 명의 박춘무 의병은 장엄한 의병출정식을 가졌다. 그리고 공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중봉 조헌(趙憲) 의병과 승장(僧將)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승군과 박춘무 의병은 청주 남부에서 연합하여 8월 1일 조헌・박춘무 의병진과 의승군, 관군, 3개 연합군 3,600여 명이 청주성을 공격했다.

 

박춘무 의병장 제향을 올리는 청주 민충사
박춘무 의병장 제향을 올리는 청주 민충사



조헌·승군 서문, 박춘무 의병 남문 공격

조헌 의병과 영규대사 의승군은 청주성 서문을, 관군은 북문을, 박춘무 의병은 남문을, 야밤에 서문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러자 구로다 왜군은 북문으로 급히 달아나서 청주성을 탈환했다. 한편, 청주성 수복 후 조헌 의병장과 영규대사는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갔다.

청주의 박춘무 의병은 진천에서 여러 날 왜군을 포위했으나 관 지원군이 오지 않아 박춘무 의병진은 포위망을 풀려 했다. 그러나 진천의 부녀자들이 포위망을 풀지 말 것을 눈물로 호소하며 음식을 갖고 와서 의병들이 음식을 먹었다. 이에 사기가 오른 박춘무 의병은 달아나는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에서 차남 박동명과 동생 박춘번은 선봉대로 큰 공을 세웠고 후에 박동명은 태안군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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