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을 앞둔 시간, 안석환 배우를 카페에서 먼저 만났다. 그는 옥천 군민들과 만들 연극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이미 대본과 무대를 그리고 있었다. 정해진 작품을 그대로 주민들에게 입히는 방식이 아니었다. 옥천 사람들의 말과 장기, 옥천의 풍경과 자랑거리를 담아 ‘옥천만의 연극’으로 다시 써 내려가는 작업이었다.
악역과 코믹, 선역을 오가며 장면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 배우. 영화와 드라마에서 개성 있는 조연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 안석환 배우는 대중에게 그렇게 기억된다. 영화 ‘넘버 3’의 강렬한 배역을 비롯해 여러 작품에서 자기 색을 보여줬지만 그의 뿌리는 연극 무대에 있다.
단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직장 생활을 하다 “인생이란 이런 게 아니구나”싶어 연극을 시작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5년만 해보자며 오른 무대가 평생의 길이 됐다. 뒤이어 스크린과 브라운관까지 오가며 활동 폭을 넓혔지만 무대는 늘 그의 자리였다. 동아연극상 연기상과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인기상을 받으며 연극배우로서 일찍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런 그가 옥천에서는 스타 배우가 아니라 ‘길잡이’를 자처한다. 시민연극교실 ‘우리 함께 살아요’로 군민들과 무대를 만들고 있어서다. 안 배우는 “연극을 가르친다기보다 같이 한다는 개념이 맞다”며 “제가 잠깐 길잡이로 앞장선다고 보는 게 더 맞다”고 말했다.
옥천과의 인연은 옥천전국연극제 추진위원 요청을 받으면서 시작됐다. 처음엔 옥천을 잘 몰라 홍보대사는 어렵다고 했지만 연극이라면 도울 일이 있다고 봤다. 그는 “축제만 열면 뭐하느냐. 내실이 좋아야 한다”며 “옥천 안에서 연극이 자라고 관객도 함께 자라야 축제의 뜻이 산다”고 했다. 그 생각이 주민들과 함께하는 시민연극으로 이어졌다.
이번 작업은 ‘2026 구석구석 문화가 있는 날—일상에 스며드는 특별한 하루’ 사업의 하나다. 공연명은 ‘우리 함께 살아요’. 옥천의 이야기를 소재로 재미와 감동을 담는 주민 참여형 창작 연극이다. 시민연극교실 방식으로 옥천의 오늘과 내일을 무대에 비추고 사람이 줄어가는 지역의 쓸쓸함과 단절을 웃음으로 풀어내려 한다. 안석환 배우가 각색과 기획을, 신수연 연출과 장경민 작가 등이 무대를 함께 짠다. 주민들은 매주 수요일 가양복합문화센터에 모여 대본을 읽고 장면을 만든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완성도보다 과정이다. 정해진 대본에 주민을 끼워 맞추지 않고 참여자의 말투와 성격, 장기를 살려 대본을 고쳐간다. 쌍절곤을 잘하는 초등학생이 있으면 그 장면을 넣고 노래를 잘하는 주민이 있으면 노래하는 장면을 만든다. 그는 “프로 배우도 아닌데 못하는 걸 억지로 시킬 수는 없다”며 “참여하는 분들이 즐거워야 작업도 산다”고 밝혔다.
이 방식은 전북 무주에서 학생들과 함께한 경험에서 이어진 것이다. 그는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를 무주 이야기로 바꿔 ‘우리 무주’로 공연한 적이 있다. 학생들에게 무주의 자랑거리와 가족 이야기를 가져오게 해 대본에 녹였다. 자기 이야기가 무대 위 대사가 되자 아이들은 더 신나게 연극에 참여했다. 그는 “옥천도 마찬가지”라며 “참여자들이 스스로 말하고 자랑거리를 꺼내면 그것이 무대가 되도록 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이번 무대의 핵심은 ‘옥천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안 배우는 창작극 ‘우리 함께 살아요’를 옥천의 말과 정서, 자랑거리로 채우고 싶다고 했다. 정지용 시인과 ‘향수’의 정서, 석호리 실개천, 옥천의 지리와 먹거리, 복숭아와 포도 같은 농산물도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는 “옥천 군민도 잘 모르는 옥천 이야기를 무대에 담아 오히려 군민들이 자기 고장에 자부심을 더 갖게 되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가 가장 깊게 붙든 화두는 ‘말’이다. 그는 지방 문화가 서울을 흉내 내서는 살아날 수 없다고 봤다. 전라도에는 전라도의 말이 있고 강원도에는 강원도의 말이 있으며 충청도와 옥천에도 그 지역의 말이 있다. 그는 “왜 문화가 중앙집권제가 돼야 하느냐”며 “지방마다 자기 특성이 있어야 하고 그 바탕은 말에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옥천 토박이 어르신들의 표현을 들으며 대본을 고쳐간다. 표준어로 쓴 말을 옥천 말투로 바꾸고 어르신들이 실제로 쓰는 표현을 배운다. 그는 “옥천 말을 제가 어떻게 알겠느냐. 그래서 어르신들에게 많이 배운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지방의 말이 살아야 지방 문화가 산다”며 “옥천도 옥천 말로 표현될 때 옥천다운 연극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연극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다. 한 지역이 자기 말을 되찾고 자기 이야기를 발견하고 함께 모여 웃고 우는 문화의 자리다. 그래서 그는 시민연극이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봤다. 올해가 씨앗을 뿌리는 시간이라면 내년에는 더 많은 주민과 청소년이 참여해 더 넓은 옥천 문화로 자라야 한다는 바람이다.
옥천 연극제와 지역 문화공간을 두고도 그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좋은 작품은 공모로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발로 뛰며 찾아와야 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한 번 올리고 끝낼 게 아니라 여러 차례 무대에 올려 더 많은 주민이 봐야 한다고도 했다. 학생과 주민이 꾸준히 공연을 접해야 관객도 자라고 그 위에서 지역 연극문화도 자란다는 생각이다.
공공 문화공간 운영에 대해서도 그는 “(문화예술)시설을 갖추는 것만큼 중요한 게 실제로 쓸 수 있게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예술인은 주로 저녁과 주말에 모여 연습하는 만큼 공간 운영도 행정 편의보다 창작자의 시간에 맞게 유연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안석환 배우가 옥천에서 만드는 무대는 유명 배우의 특별 강의가 아니다. 옥천 사람들이 자기 말로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그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다시 옥천의 문화가 되는 과정이다. 그는 “올해 이렇게 씨앗을 뿌렸으니 내년에는 더 나아간 모습으로 이어지면 좋겠다”며 “연극으로 옥천 문화가 조금이라도 더 살아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