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비색(高麗翡色)’을 빚으며 고귀한 꿈을 지키다
고려청자 명인인 상명 양금석(70·석산도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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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비색(高麗翡色)’을 빚으며 고귀한 꿈을 지키다
고려청자 명인인 상명 양금석(70·석산도예)씨
  • 이창재기자
  • 승인 2017.02.16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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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백자 전수하며, 신앙을 전하는 신학자로서의 삶도
변산 위군섭 선생 제자에서 한양대요업연구소 숙련장으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에 작품 헌정, 현 안내면서 후학배출

1123년 고려 인종 원년에 송나라 휘종의 사신으로 개경에 온 서긍은 ‘선화봉사 고려도경’이라는 책의 ‘도준(陶濬)’이라는 항목에서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이라고 부르는데, 근래에 와서 제작 솜씨가 공교해졌고, 빛깔도 더욱 아름다워졌다”라고 해서 그 때부터 ‘고려비색(高麗翡色)’이라는 말이 고려인의 우수성을 알리는 말로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24년 동안 안내면 월외리에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고려비색(高麗翡色)’을 빚으며 살아온 양금석 청자명인을 만나 청자에 얽힌 50년 세월 속에서 장인의 삶을 살아온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국보 영인본인 청자어룡주전자

‘뜨거운 불가마에 가슴을 불태워도 / 재가 되지 못하고 살아난 불사조 /

청자 곁에 서 있으면 영혼은 뛰놀고 / 이상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네

옷깃을 여미고 고운자태 바라보면 / 천년의 꿈 빚어내는 숨결소리 들려오네 /

푸른향기 푸른미소 영혼의 빛이여 / 청자 고운 푸른 빛 청춘의 빛이여’

〈박원자 시인의 ‘청자예찬’ 전문〉

 

한양대학교 요업연구소서 피어난 청자와의 인연

 

양금석 명인은 지난 1963년, 열일곱 나이에 인천에서 변산 위군섭 청자 명인의 제자로 사사를 받으며 청자와의 인연을 시작하게 됐다.

양금석 명인은 여기서 청자를 빚는 과정은 참으로 참을성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청자를 빚는 흙을 만드는 태토 작업을 하나 해도 주성분인 흙만 10가지 이상을, 철분이 6% 이상 섞어지게 해야 했다. 검은 흙 재료와 흰 흙 재료를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1300℃이상 되는 가마에서 구울 때 흙의 변형 유무가 결정된다는 것을 철저히 배워나갔다.

또 점토 비율이 50% 정도는 지켜야 가소성(형태를 유지하는 성질)과 내화성(불에 견디는 성질)이 지켜진다는 것, 유약도 장석, 규석, 석회석을 골고루 배합해 써야 한다는 것 등을 배우며, 청자를 빚는 흙을 만드는 태토에서부터 성형, 조각, 초벌구이, 유약바르기, 본 소송(재벌구이)에 이르기까지 청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순청자는 보름, 상감청자는 이십 일 쯤 걸리도록 진을 짜내야 한다는 것을 배워 나갔다, 그러고도 가마 하나를 다 채우기까지 두 오달을 넘게 기다려야 그제서 가마에 불을 지피고 구워낼 수 있다는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어린 아기 걸음 내딛듯이 배워나가야 하는 수련의 과정이었다.

그 후 이렇게 5년 여를 위군섭 선생에게 배우며 태토, 조각, 성형, 유약 바르기, 가마 굽기 등의 기술을 습득하고 난 후, 1968년 한양대학교 공대에 설립된 요업연구소 박금철 교수의 권유로 스승인 위군섭 명인과 함께 한양대 요업연구소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한양대학교에서는 요업과(도자기, 유리 등 불가마를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작업을 다루는 학문)를 만들고, 독일의 원조를 받아 돌을 갈아 도자기를 빚는 유약 가루를 만드는 크래셔 등의 최첨단 기계 설비를 갖춘 요업연구소가 생겼는데, 그 연구소의 경력자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흙의 조합, 불의 사용법 등 청자와 백자 등 전통도자기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을 배우며 연구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군대에 다녀온 후 경기도 고양시 벽제에 있는 도자기 공장에서 태토에서부터 가마 작업까지 전 과정의 숙련된 장인(匠人)으로 일하게 됐다.

그러면서 차츰 양금석 명인의 솜씨는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어느새 지인들은 그의 작품을 눈 여겨 보며 구매를 하게 됐고, 본격적인 주문이 이어지자 1981년쯤에는 경기도 용인 민속촌 인근에 아예 ‘석산도예’라는 본인의 작업장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을 시작하게 됐다.

 

40년 간 신학대 강사로, 50년 간 청자 명인으로

 

또 1976년에는 신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신학을 병행하면서도 청자 장인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는 이 시기의 삶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전통 도자기는 단순히 흙을 빚는 작업이 아닙니다. 정말 혼신의 열정을 다해서 마음에 쏙 드는 도자기가 완성됐을 때 그 만족감이란 말로 표현 못하죠. 그런데 신(神)에 대한 학문을 하는 재미도 도자기를 빚으며 얻는 만족감과 비할 수 없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학대와 대학원을 다니고 강단에 서면서도 그 즐거움 때문에 도자기에서 손을 못 떼겠더라고요. 이런 이유에서 강단에서 신학, 철학을 강의하며 40년 동안 청자, 백자를 구우며 50년 세월을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청자는 또 다른 인연의 도화선이었다

 

그는 ‘석산 도예’를 운영하며 도자기 사업을 할 때 놀랄 만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1981년 용인에서 사업을 할 때 우리나라 마지막 황자인 영친왕의 일본인 부인 이방자 여사와의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영친왕은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천황의 사촌인 이방자(마사코) 여사와 결혼하고 1963년 환국했다. 이방자 여사는 한국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벌였는데 이때 도움을 준 지인들에게 우리나라의 전통 도자기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로 꼽힌 것이 바로 양 명인의 도자기였다. 그가 수준 높은 작품을 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확실한 예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때 이방자 여사에게 제공했던 작품 몇 점을 보관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여름에 쓰는 찻사발로, 비색의 도자기에 구름과 날아가는 학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또 선물을 담았던 상자에는 한문으로 ‘고려소 청자차완(찻사발) 낙선재 이방자’라는 글귀와 이방자 여사의 직인이 찍혀 있다.

나무 상자의 뚜껑에는 무궁화를 닮은 작은 꽃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국화인 배꽃 ‘이화(梨花)’라고 한다.

그 외에도 그가 운영하는 ‘석산도예’의 도자기들은 일본의 유명 백화점과 도자기 사업을 하는 기업들에 대량 수출되고, 유명백화점 상설전시장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하는 등 제법 사업 수완이 좋았다고 회상한다.

 

“옥천으로의 이전은 또 다른 시작 이었어요”

 

청자 명인의 타이틀을 지키며, 동시에 신학교 교수로의 삶에 늘 분주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는 잠깐의 휴식을 위해 대청호 길을 따라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옥천군 안내면 월외리 마을을 발견했다.

평생 고향인 인천, 서울과 경기도에서 생활했던 그는 포근하게 산세가 감싸고, 따스한 햇볕이 드는 마을이 마음에 쏙 들어 1993년 그렇게 옥천에 주저앉아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노년을 조용히 보내겠다는 생각으로 안내면으로 들어온 양 명인의 청자와 신학 강의에 대한 열정은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이곳 향수의 고장에서도 식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로 다니며 신학강의를 계속하였고, 용인 공장에서 쓰던 가마 두 개를 옮겨와 여전히 도자기 작업을 하고 있고, 지난 2007년부터는 마을에 ‘예인교회’라는 작은 교회를 짓고 목회활동도 하고 있다.

또 지난 2010년부터는 ‘모단스쿨’, ‘사랑방 문화예술프로그램 흙으로 삶을 빚다’, ‘자기랑 전통도예 동아리’ 등의 프로그램으로 후학들에게 전통 도자기를 빚는 방법을 가르치며 더욱 분주하게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 이렇게 도자기를 빚는 매 과정마다 ‘도자기 체험장’이나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도자기 전시회)’ 등을 만들어 청자와 백자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큰 결실도 맺어 옥천에 내려와 가르쳤던 제자 중, 지난 해 12월에 ‘제17회 인천광역시 미술전람회’에서 손미선 씨가 ‘청자연화문동자형수반’으로 특선의 영광을, 같이 도예를 배운 한은미·은희 자매는 이 대회에서 나란히 입선하는 결과를 얻기도 했다.

 

이제는 또 다른 꿈을 가집니다.

 

“혼이 안 들어 간 작품은 상품이지 작품이 아닙니다. 예술혼이 담긴 완성의 단계를 맛본 사람은 완성을 위한 열정으로 기꺼이 모든 상황을 감내하며,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삶을 살아가지요. 모든 삶의 영역이 마찬가지죠.

이런 이유에서 저에게는 그동안 지나온 삶을 바탕으로 마지막 남은 꿈 세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그 동안 옥천에서 가르쳤던 제자들과 크건 작건 옥천에서 정기적으로 한 번씩 도자기 전시회를 열어 청자와 백자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동안 꾸준히 제자들을 가르치며 체계적으로 전통도자기의 명맥을 이어가게 하는 길을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상에서 옥천에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육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이고, 그 제자들이 옥천에 남아 옥천을 여주나 이천처럼 전통도자기의 집산지로 키워보고 싶은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끝으로 전국에 산재한 도요지를 한 곳에 모으고,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한국 전통도자기 역사를 한 곳에서 살펴볼 수 있게 만드는 전통도자기박물관을 전국 교통의 중심지인 옥천에 유치해보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청자 명인의 눈빛에서 열정을 품은 대가(大家)의 고귀한 숨결을 느끼게 했다./이창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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