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들 알아서 물건 척척…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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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들 알아서 물건 척척…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 천성남국장
  • 승인 2017.06.2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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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역사 사료판매 1호점 ‘동성상회’ 이문기(84)옹

1950년대 금구리 터에서 학생 문방구로 시작

 20년 전 가축사료 판매 시작 하루 500t 팔아

소값 파동 땐 사료값 대신 소 몰고 오기도

 부친 유지 받들어 지켜온 가게 인생보물 1호

 

배합사료 전문 판매점인 동성상회

한 동네에 고즈넉이 서 있는 오래된 가게 앞을 지나치다 보면 누구라도 아련한 옛 추억 속으로 한 번쯤 푹 빠져들게 마련이다. 옥천중학교(1회) 시절, 부친이 운영하던 문방구에서 일을 도와주며 일했던 그 가게가 지금은 사료가게(옥천읍 금구리1)로 변신해 있다. 아들의 운영 역사로는 70년이지만 부친의 운영 역사까지 합치면 100년이 훌쩍 넘는 오랜 가게의 역사를 표상하고 있다. 6.25전쟁 때 대구까지 피란을 갔다 돌아왔을 때 앞집은 새카맣게 전소 됐으나 이 집만은 고스란히 남아 가족들을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공비(북한군)들이 집기를 몽땅 털어갔다고 당시를 회고하는 이 옹은 작고(96세)한 지 꽤 오래된 부친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쏟아냈다. 한 자리서 100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사료 판매점 ‘동성상회’다. 터줏대감 이문기(84) 옹을 통해 옥천지역에서 축협이 생기기 이전부터 사료를 팔아왔던 1호점 동성상회의 얽힌 옛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이문기 옹이 왕단골 고객을 위해 20㎏ 소 사료를 차에 직접 실어주고 있다

“친구들이 장사하는 것이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해서 잘되든 못되든 관계없이 가게를 열고 있어요. 무엇보다 오랜 왕단골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어서 좋구요. 오래전부터 이 가게를 찾아주는 단골들은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내게 직접 사료를 달라 하지 않고 자기네들이 알아서 20㎏짜리 사료를 번쩍 들어다가 차에까지 싣고 가는 등 시골 정을 듬뿍듬뿍 받고 살고 있어 매일매일이 행복하네요.”

 

아내와 한번도 떨어져 산 적 없어

70여 년을 하루 같이 가게 문을 열고 사료판매를 해온 이 옹은 “이 일이 없었으면 무슨 행복이 있었을까 자꾸 궁금해질 때가 있어요. 지금껏 아내와 단 하루도 떨어져 살아 본 적이 없어요. 서로 내조, 외조하며 알콩달콩 살아온 거지요. 그러고 보니 아내(강구용·79)와는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을 만큼 화기애애하게 이 가게를 지켜온 것은 나름 인생이 준 최고의 행복인 것 같아요.”

이문기옹

형님들 소 키워 사료 판매 시작

6남2녀의 형제 중 남동생(공군대위 제대) 하나를 사고로, 여동생 하나를 질병으로 잃었다는 이 옹은 “당시 이 가게에서 형제들이 부대끼며 생활을 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그대로 역사이지요.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한자리에서 가게를 운영해 온 것은 가족들의 힘도 있었겠지만 부친의 유지를 받든 내 마음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당시 문방구를 접고 사료판매 가게로 만들었던 계기는 바로 형님들이 인근에서 닭이나 소 등 가축을 먹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당연히 사료가 필요하고 그로 인해 시작을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건강 위해 가게 열어

“20여 년 전만 해도 사료판매 가게는 규모가 대단히 컸어요. 그에 따라 거래량도 상당했지요. 지금은 하루 몇십 포대 정도 팔고 있지만 당시는 하루 사료판매량이 500t이나 되었지요. 아주 많은 때는 그것보다 더 되기도 했구요. 수입도 대단해서 큰돈이 오가고 했어요. 사료 가게의 전성기였다고 보아도 될 정도였지요. 그러나 지금은 현상유지도 안 되는, 오히려 건강을 위해 이 가게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사람들을 매일 만나 얼굴을 마주치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얼마나 좋아요.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치매 예방을 위해선 가게를 열고 있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하는데 제가 생각해도 전혀 틀리지 않아요.”

산란계, 육계 병아리 사료를 쌓아놓은 모습

사료값 고스란히 공중에 떠버려

70여 년이 넘는 사료판매 가게를 운영해오면서 생겼던 일화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헛헛해진다는 이 옹은 “90년대 소값 파동이 났을 때 많은 축산농가가 어려움을 겪었지요. 소값이 너무 떨어지다 보니 소들을 많이 키워도 생산단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농민들이 가져간 사료값은 고스란히 공중에 떠버리고 내 빚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어요. 빚을 받을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사료값을 갚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기만 한데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오히려 내겐 고마운 일이지요. 일례로 당시 한 고객은 사료값 대신 소 2마리를 끌고 온 적도 있었어요. 이분뿐만이 아니고 사료값 대신 소를 끌고 오는 분들이 몇몇 있었어요.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만두라’고 하면서 도루 몽땅 소를 돌려보낸 일이에요. 잘 키워 보시라구요. 낸들 소를 키울 곳이 있습니까. 어쩝니까.”

 

수십년 뒤 100만원 들고 오기도

소값 파동으로 가축농들은 어려움 속에 닥쳐오는 경제적 어려움을 감당해야 했다. 더욱이 생산단가가 나오지 않아 팔아도 손해를 보니 팔 수도 없었고 죽일 수도 없었던 그런 불가항력적인 세태를 반영하는 그 사태는 경제적 분수령이 될 만큼 여파가 컸다.

“오죽하면 수백만 원의 사료값을 떼이고 살았겠습니까. 지금 같으면 법으로라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그러지도 못했어요. 한참 세월이 흘러 사료값을 가져다주는 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참 감동적이었던 것은 이백리에 사는 한 분이 돈 100만원을 놓고 간 일이었지요. ‘그만두라’고 애써 말렸지만 그래도 돈을 놓고 가는 그분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번창했던 가게가 소매점 전락

번창했던 사료판매 가게가 지금처럼 축소된 것은 소값 파동 이후였다. 이 옹은 당시 허덕이는 빚잔치, 사료값을 받지 못해 깔리는 외상들, 말할 수도 없이 힘겨운 상황 등 지금의 사료판매 가게가 된 데 따른 어려웠던 사연들을 펼쳐놓았다.

“그래도 이 가게를 하면서 1남 3녀의 아이들을 잘 키워냈지요.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남들이 이야기하지요.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노력하면 하늘이 감복해 도와준다고요. 자식 농사가 사업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금 생각하면 맞는 말이지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 농사는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식들 덕에 미국, 캐나다, 호주, 동남아시아 등 해외여행을 실컷 구경했지요. 이게 다 무슨 복이냐 싶어 마음이 흐뭇하기도 했어요. 감사하지요. 더욱이 작고한 부친에게 감사할 때가 많아요. 아름다운 가게를 물려주신 그 마음이 고맙지요.”

강아지, 고양이 사료를 진열하고 있다

자식농사 잘 지어 큰 보람

돈보다 자식 농사 잘 지은 것이 큰 보람이라고 말하는 이 옹은 가지런히 박힌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또 한번 어려움 속에서 피어났던 행복함을 과시한다.

“내 이는 틀니가 아니고 전체 인플란트를 해서 지금도 청년처럼 음식을 먹을 수 있어 행복해요. 아내도 틀니를 빼내고 전체 인플란트를 해 넣었어요. 우리 부부가 사는 행복은 이가 튼튼해 음식을 잘 씹을 수 있다는 고마움이지요. 자식들 농사해 이정도로 선물을 받았으면 과한 것 아닌가요? 큰아들 종권씨는 대전 토지공사에서, 둘째 미자씨는 결혼해 잘 살고 있고 셋째 종찬이는 구일리 농장대표로 일하고 있고, 막내 종관이는 회사 대표로 있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 손녀까지 내게 남은 보물들이지요. 누군들 재산과 바꾸라면 바꾸겠습니까?”

 

삼양초 동창회 해체 위기 맞아

옥천 삼양초(4회)를 나온 이 옹은 “친구들도 이젠 다 죽고 12명 남았어요. 놀러 오지도 못하고 놀러 가지도 못하고 세월이 주는 허탈감은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밖에 없어요. 인생은 살아가면서 100살까지도 배워야 한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이 나이를 먹었는데도 힘들게 배워야 하는 것이 눈만 뜨면 생겨나니까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창회’가 있었어요. 그러나 ‘동창회’가 세월 속에 해체되기까지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나니 허탈함만 남았네요.”

 

내후년 60주년 기념 회혼례 계획

남들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해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하루를 사는 동안에도 잘못하는 일이 늘상 있다는 이 옹은 “내후년은 결혼 60주년을 맞는 날로 ‘회혼례’ 잔치를 할 생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때 초청할 거니까 꼭 오라”는 이 옹의 얼굴에는 해맑은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

그리고 “돈보다 사람이 중하다”는 말이 실감 난다는 듯 이 옹은 “지금은 작고했지만 보은 방면 소태골에 사는 한 지인이 사료값 대신에 소를 끌고 왔는데 도로 돌려보내면서 잘 키우라고 한 말이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 라는 생각이 든다”며 “소값 파동 이후 축협이 생겨나고 단위조합이 생겨나고… 이제는 소규모로 강아지 사료, 병아리 사료, 소 사료 등만 취급하고 있지요.”

이문기옹이 사춘 형제지간인 제44대 이영기 정보사령관 이·취임식에 참가,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다.(우측에서 네 번째가 이문기옹)

가게 문의 문구 유달리 정겨워

수년 전부터 국내 동물사육용 배합사료 판매업소는 사료 가격을 비교할 수 있게 제품별 전월 평균 판매가격표를 판매 장소에 비치해야 하는 것에 따라 그의 가게에는 종이에 써 붙인 사료명과 가격이 나란히 붙어 있다.

‘일본협동사료 기술제휴’라고 조그맣게 가게 문에 써 붙인 문구가 유달리 정겨워 보이는 것은 ‘인지상정’이 느껴지는 오래된 가게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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