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로, 몽골로, 바이칼로… 스님은 왜 대륙을 헤매고 다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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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몽골로, 바이칼로… 스님은 왜 대륙을 헤매고 다녔나?
  • 도복희기자
  • 승인 2017.11.02 1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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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가산사서 의·승병 2400명 군사훈련
금산전투 등서 전원 전사 불구 기념탑조차 없어
승병 600명은 시신도 수습 못해 까마귀밥으로
“우리 민족사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이 화근”

안내면 가산사(주지 지승스님)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창건됐다. 무려 1300년 전이다.

이 절의 사당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었던 중봉 조헌 선생과 승병을 이끌었던 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심상치 않은 일이다. 주지인 지승 스님의 이력도 심상치 않다. 그는 40여 년 동안 만주와 대흥안령, 몽골, 바이칼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직접 두발로 답사했다. 그는 왜 그 먼 거리를, 그토록 오래 여행했을까? 사찰 경영엔 관심이 없다면서도 왜 가산사 주지 역할은 계속하고 있을까? 가산사를 찾아가 직접 물어보았다. -편집자 주-

가산사 사찰 모습

홍익인간 정신 전파 위해 매년 단군제도 열어

▲의병 시신만 수습, 칠백의총에 모셔

“423년 전 금산 연곤평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영규대사는 승병 600명, 조헌 선생은 의병 700명을 모아 함께 2만여 명의 왜군과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중봉 선생의 칠백 의병은 그 시신이 수습돼 칠백의총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기허당의 승병은 까마귀 밥이 되고 말았다. 생각하면 애통하고 절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승스님은 정치적 이유로 의승병을 방치한 당시 조선 조정과 이를 시정하지 않는 현대의 정부에 분노했다. 그는 "이 나라는 오랫동안 친일파가 권력을 독점해 각종 잇권을 나눠먹고 있다. 하루 속히 친일파가 이 땅에서 물러나야 희망 있는 내일을 꿈꿀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저서를 보고 있는 지승스님.

▲힘을 합쳐 싸웠던 의병과 승병의 혼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가산사

가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다.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자는 미상이다. 그 뒤 작은 암자로서 명맥만을 유지해오다 임진왜란 직전 영규(靈圭)가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전소됐다. 1624년(인조 2) 다시 중건하여 극락전과 목불상(木佛像)을 조성했다. 숙종 때에는 영규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이 절을 호국사찰로 지정했다. 사당 안 왼쪽에 중봉 조헌 선생, 오른쪽에 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유교와 불교를 떠나 나라를 위해 힘을 합쳐 싸웠던 의병과 승병의 혼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셈. 지승스님은 “중봉 조헌 선생의 의병은 금산 칠백의총에 모셔져 국가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는데, 함께 목숨을 바쳤던 600여 명의 승병은 시신도 수습되지 못한 채 기념탑 하나 없이 방치되고 있다”며 비통해했다.

 

▲가산사에서 훈련 받았던 2400명에 대한 ‘순국충혼위령탑’ 세워야
스님은 "가산사에서 의병과 승병 2400명이 훈련을 받았다. 이들이 금산 전투 등에서 왜군과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이들을 위한 순국충혼위령탑과 사당을 세우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이것은 후손이 해야 할 의무”라며 “도랑 건너 2만여 평을 정부가 사들여 칠백의총 같은 사적지를 조성해주도록 정부와 국회에 청원했다”고 말했다. 또 “대한민국의 건국 초석에는 수많은 선열들의 무서운 희생이 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내가 가산사에 있는 이유도 이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축소된 한민족의 역사를 찾아 떠난 이유

“백제가 망할 때 사비성의 불길은 역사창고(史庫)에서 시작됐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제 임금의 명령을 받고 사고에 불을 질렀다. 그 불길은 수개월 동안 계속됐다. 고구려가 망할 때도 사고에서 오른 불길이 평양성을 태웠다. 불길은 무려 4개월을 타올랐다. 우리 역사는 그때부터 이미 축소되고 사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가 궁금하면 이제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나오는 「동이(東夷)전」을 들추는 것이 고작이다”

지승 스님은 이러한 현실을 너무나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제가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해 한국사를 철저하게 왜곡하고, 이곳에서 10여 년 동안 일한 이병도(李丙燾)의 식민사학(植民史學)이 해방 후에도 교단을 장악해 조작된 역사를 후손에게 버젓히 가르치고 있었던 것. 이를 참지 못한 스님은 스스로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해 길고 험난한 여정에 오르게 된다.

가산사 주지 지승스님

▲모든 개국신화는 역사의 햇빛으로 나오기 직전 탯집 안의 소식

해 저물 무렵 찾아간 가산사, 지승스님의 역사관은 분명하고 단호해 보였다. 그는 몽골족 · 만주족 · 허절족 · 시바족 · 다굴족· 어원커족· 어룬춘족·을 취재하는 동안 늘 아리랑을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잃어버린 역사가 떠나버린 님만 같아서 그 님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지승스님은 그 후 다시 5년간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능묘와 사당을 찾는데 전력한다.

“중원문명의 비조(鼻祖)가 된 삼황(三皇)과 그 문명을 계승시킨 오제(五齊)는 배달나라의 신하였다. 그들은 배달나라 정부의 명령을 받고 고립어(孤立語)를 쓰는 한족(漢族)의 땅에 가서 제후를 살았다. 그들의 사당과 능묘가 지금도 서토대륙의 복판을 누르고 있는 것은, 저 서토중원(西土中原)이 바로 우리 변두리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지승스님의 상고사 기행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 인간이 중심이 되어 만물과 하나로 화합하고자 하는 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해마다 가산사에서 ‘단군제’도 열고 있다. 그동안 『피야 피야 삼신 피야』, 『우리 상고사 기행』, 『아리랑』,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 세상』,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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