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중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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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의 고백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3.1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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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요즘도 작품이 작가가 인식하지 못한 범위에서 엉뚱한 잡지에 실려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1930년대에도 이러한 일들이 있었음이 윤석중의 고백을 통하여 전해온다.
“동요도 당당한 시요 문학 작품임을 일반에게 일깨워 주기 위하여 지용의 「말」, 「지는 해」, 「홍시」를 구해다가 작가의 승낙도 없이 ‘동요’ 대목에 담”았다고 윤석중은 고백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兒童文學 周邊」, 『韓國文壇 裏面史』, 깊은샘, 1983, 195면.)

1938년 섣달에 내 손으로 엮어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낸 『조선아동문학집』은 그때까지의 우리 아동문학 작품을 총정리한 점에서 뜻이 컸었다. 94편에 이르는 동요·동화·동극·소년 소설 등은 그 당시의 최고 수준에 미친 작품들이었는데,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주요한의 「꽃밭」, 「잊는다면」, 지용의 「말」, 「지는 해」, 「홍시」를 구해다가 작자의 승낙도 없이 ‘동요’ 대목에 담은 것은 동요도 당당한 시요 문학 작품임을 일반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 이 책에 등장한 56 작가 가운데 (중략) 생사불명이 열 셋, 자의나 타의로 북으로 간 사람이 열 하나, 남으로 넘어온 사람이 둘, 그리고는 살아있으면서 아동문학과 동떨어진 일을 하고 있는 이가 대부분이어서, 나라가 엎치락뒤치락하는 통에 아동문학 역시 그 얼마나 기구한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다.

정지용, 김소월, 주요한의 작품을 구해다가 『조선아동문학집』에 싣게 된 연유를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는 정지용의 당시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부분이다.

어느 시대에나 문학은 힘들고 궁핍함을 면키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말과 글을 사용함에 자유롭지 못하던 일제강점기에는 오죽하였으랴.

1936년 ‘구인회’가 동인지 『시와 소설』을 창간하는 한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무기정간을 당하였다. 그해 8월 마라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실었기 때문이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이 일어나고 그해 10월 조선총독부는 「皇國臣民誓詞」를 공포하였다. 이로 우리말 출판물의 발행이 줄고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어릴 때부터 길을 들여 주어야 한다고 우리글이나 우리말을 보통학교(현 초등학교)에서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국어상용」이란 「고꾸고 조오요우」라는 것으로 일본말만 쓰자는 것이었다.

1937년,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정지용은 북아현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오남 구상을 병으로 잃는다. 그리고 2년 후 1939년 정지용의 부친이 사망한다. 정지용이 포함된 국내외 사정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1940년 창씨 개명제가 실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강제 폐간, ‘조선문인보국회’가 발족되었다. 1941년 ‘국민문학’이 등장하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최현배, 이희승 등 30여명이 갇혔다.

1943년 학병제가 실시되었다. 이때 춘원과 육당 일행은 동경으로 간다. 유학생 권유 강연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이때 유학생과 춘원 육당 일행은 언쟁이 있었다. “나가야 옳으냐? 안 나가야 옳으냐?”, “권하는 그대들이 책임을 지겠느냐? 못 지겠느냐?” 명치대학 강연회장은 살기등등하였다고 한다.

이때 윤석중과 춘원 사이에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윤석중은 춘원에게 찾아간다. 춘원은 마해송의 주선으로 기꾸찌깐(소설가)이 잡아준 ‘산노우시다’ 어느 여관방에 감기가 심해 누워 있을 때였다.

“대운동회 때 말입니다. 열 바퀴를 도는 내기에 열 한 바퀴나 열 두 바퀴를 돌았다고 해서 기록이 더 좋아지거나 상이 더 올 턱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는 일본 사람보다 한 술 더 떠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스럽게 군다고 해서 우리 민족에게 이득이 더 오겠냐는 당돌한 핀잔이었다. 춘원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기침이 자꾸 나서 말문을 열지 못 하였다. 이 일화는 윤석중의 「兒童文學 周邊」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원의 끄덕임과 그들의 뒤안길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학사 그리고 개인의 운명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알면서도 이해하면서도 분노의 화살은 춘원을 향하여 비수로 꽂힌다. 그런 세상이었다. 그러하였다고들 한다.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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