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흔아홉이 벅차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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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흔아홉이 벅차겠구나」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3.2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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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6·25를 맞이하던 1950년, 정지용의 나이 마흔아홉.
정지용은 『새한민보』에 ‘詩三篇’이라는 큰 제목 아래 「내 마흔아홉이 벅차겠구나」라는 자신의 인생을 예언한 듯한 시를 발표한다.
선택하였든지 선택을 당하였든지 ‘조선 문학가 동맹’으로 심란했었을, 이후 정지용의 정서를 일정부분 반영하였을 이 작품을 근래에 정독하였다. 필자는 'writer'로의 정지용보다 생활인으로의 정지용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시를 감상하여 보기로 한다. 그만큼 정지용의 고뇌가 무거웠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당시 이념과 생활 그리고 그가 처한 환경 사이에서 그 혼란의 경계를 건너는 것의 곤궁에 머리가 흔들린다.

헐려 뚫린 고개
상여집처럼
하늘도 더 껌어
쪼비잇 하다

누구시기에
이 속에 불을 키고 사십니까? 
불 디레다 보긴
낸 데 
영감 눈이 부시십니까?

탄 탄 大路 신작로 내기는
날 다니라는 길이겠는데
걷다 생각하니
논두렁이 휘감누나

소년감화원 께 까지는
내가 찾어 가야겠는데

인생 한번 가고 못오면 
萬樹長林에 雲霧로다………
            - 「내 마흔아홉이 벅차겠구나」(『새한민보』 제4권 1호, 1950.2, 111-113면.)전문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상여집”처럼 “껌”고 “쪼비잇”한 세태 속에서 불을 켜고 살아가는 이는 누구인가? 시적 화자는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있다. 나, 즉 조선인의 해방인데 그 해방의 길을 걷다보니 외세와 이념이 끼어들어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길은 내가 찾아 가야만 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무상하여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구름과 같은 것이라고 화자는 말끝을 흐리우고 있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듯이. 아니 미리 자신의 미래를 명확히 견지하고 있었던 듯이.
이렇게 정지용이 석연치 않은 마흔아홉 해를 마무리 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와 관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해방은 그를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집어넣고 만다.
그러면 정지용의 문학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 정지용 관련 문단 상황을 개괄적으로 짚어보도록 한다.
해방 직후 문단의 시급한 과제는 친일문학 청산과 민족문화 방향 정립 그리고 문단의 정비에 있었다. 일부 문인들의 친일적 문학행위가 규탄의 대상이 되었고 문학인들에게도 현실의 혼란이 수습의 대상이 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이념의 정립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 통치권이 소멸되면서 ‘조선건국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해방을 맞이하고 하루가 지난 1945년 8월 16일 종로 한청빌딩의 ‘조선 문인 보국회’ 간판이 내려졌다. 이로 일제 침략세력에 동조하였던 문인들은 친일문학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선 문학 건설 본부’(임 화, 김남천, 이태준 등)라는 간판이 걸린다. 이후 음악, 미술, 영화 등을 연합하여 ‘조선 문화 건설 협의회’(서기장 : 임 화)를 발족(1945. 8. 18.)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카프의 문학적 공과에 불만을 가진 일부 문인들은 ‘조선 문화 건설 협의회’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다. 이에 변영로, 오상순, 박종화, 김영랑, 이하윤, 김광섭, 이헌구 등이 ‘조선 문화 협회’(1945. 9. 8.)를 발족한다. 후에 양주동, 김환기, 이선근, 유치진 등이 합세하여 적선동 성업회관에 사무소를 차리고 『해방 기념 시집』을 발간한다.
당시 문학계는 사상이라는 혼란이 가중되며 비틀거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적이 일본이라는 단일한 것이었지만 해방을 맞이하고 보니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참 슬픈 일이다.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누고 의심하며 등지고 살아야하던 세월. 그들은 그렇게 슬픈 역사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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