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직한 인품의 청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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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직한 인품의 청백리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3.04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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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전팽령 선생
송정 전팽령 선생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커 자신의 봉급으로 빈민들의 배고픔을 덜어 주기도 했다.
송정 전팽령 선생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커 자신의 봉급으로 빈민들의 배고픔을 덜어 주기도 했다.

 

돈은 자주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수사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고위 관리직들의 뇌물수수 행위가 틈만나면 대서특필되는데 포렌식 복구 방법도 없었던 과거에는 이와 같이 뇌물 관련 문제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를 세우거나 반정을 일으켜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데 성공한 공신들 또한 뇌물을 받는 행위가 빈번했음이 기록에 나와있고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단어로는 ‘매관매직’이 있다.

고위직들이 돈을 받고 과거 시험 합격, 추천 등을 보장하며 관리직을 팔았던 것.

이렇듯 시대와 시대를 꿰뚫고 돈의 유혹이 그치지 않았지만 그 유혹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을 일컫어 ‘청백리’라 부른다.

‘청백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모범 관료에게 수여되는 명칭으로 조정에서 청렴결백한 관리로 뽑히는 것이며 동료들의 평가,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정부의 검증절차,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장급의 추천을 통해 검증과 심사를 통과해 받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통틀어 총 217명이 선정됐는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난 송정 전팽령 선생도 그 중 한 사람이다.

1480년 조선 성종대에 태어난 송정은 8세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소학을 공부했고 18세부터는 과거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25세에 생원시를 합격하고 관시와 별시에서 연달아 장원으로 합격했으며 7년 후인 32세에는 장악원별시에서 장원급제하는 큰 업적을 이뤘다.

송정이 40세 되던 해 중종이 등극하고 궁의 분위기와 관습들이 많이 변했다.

특히 경외관의 추천으로 왕이 직접 참관하는 친시를 보게 된 그는 2등에 올랐으나 사양하고 과거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작정 과거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 이미 간신들이 정권을 잡고 현자들이 큰 고통을 받으리라는 것을 예언했고 이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3년 후 송정은 성균관 별시에 장원 급제하고 다시 2년 뒤 세자 입학 기념 별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했다.

경주에 부임해 경학을 가르쳤던 송정은 48세가 되던 해 임금에게 향축을 문제삼았다가 파면당하고 본직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수많은 관직 임명을 거쳤지만 지병으로 인해 여러차례 사양하거나 취임하지 못했다.

그는 52세에 평안도 평사에 발탁돼 부임했는데 이듬해 봄 성균관 전적겸 중학교수로 발탁, 이어 형조좌랑, 공조좌랑, 형조정랑 순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그가 56세에 그의 큰형을 잃고 상을 치르러 옥천에 돌아왔는데 작은 형 송오공 또한 병을 얻어 고향에 돌아와있었다.

둘은 큰 형의 죽음을 슬퍼하며 한동안 취원정에서 강회를 가지며 형제의 정을 나눴다.

이후 그는 62세에 단천군수직, 63세에 삼척부사직, 65세에 밀양부사직을 마치고 이듬해 옥천으로 돌아왔다.

68세, 송정은 이미 지병을 앓고 있었지만 조정에서 불러 상경하니 정3품의 관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상주목사로 부임하는데 그 해에 사람이 서로 잡아먹을만큼 끔찍했던 대기근이 시작됐다.

선생은 공적으로 주는 봉급을 헌납하고 성 밑에 솥을 걸어 죽을 끓여 빈민에게 나눠 최대한 굶는 사람이 없게끔 처리했다.

이렇듯 큰 일을 모두 처리한 선생은 1560년 옥천 양신정에서 눈을 감았다.

송정 전팽령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의와 일을 처리하는 지혜로움, 청렴하고 올곧은 기개는 지금까지도 옥천 군민에게 큰 시사점을 남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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