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역사를 껴안은 ‘이종학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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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역사를 껴안은 ‘이종학 선생’
  • 강형일기자
  • 승인 2021.06.0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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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학 선생이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종학 선생이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100세가 되는 올해 영면한 이종학 선생은 1922년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그는 12세에 죽향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했고 17살 때 대전공업학교(현 한밭대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철도청 대전사무소에 입사해 토목기사로 일하던 중 23살 되던 해인 1945년 일제강점기가 끝났다. 28살 되던 해인 1950년 6·25가 발발해 선생은 고향인 동이면 평산리로 피난 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같은 해 7월 초순, 논으로 일하러 가는데 무장 경찰들이 몰려오더니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논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선생의 눈에 언덕 위의 20m 폭 구덩이가 파인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도착한 트럭 두 대에서 사람 수십 명이 내렸다. 구덩이 앞에 꿇려진 그들을 대상으로 연이은 총소리가 울렸다.

선생은 그렇게 보도연맹 학살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이 됐다.

5·16 군사쿠데타 당시 선생은 서울의 교통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양심을 가지는 것도 사치였다. 침묵이 미덕인 시대였다.

복지부동(伏地不動) 생활에 염증이 생긴 선생은 1974년 고향인 평산리로 귀농해 밤나무 과수원을 조성한다. 밤나무 묘목을 심고 황무지를 일구는 일이 이어졌다. 과수원으로 통하는 진입로와 오두막도 지었다.

이 선생은 모순된 시대에 맞선 지식인이었으며 공부하는 농부였다. 풍력과 태양광 등 청정에너지 개발도 선생의 이런 연구 정신의 결과였다.

1997년 7월 장대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전날부터 내린 장대비로 인해 개간하느라 파헤친 언덕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인골이 발견된다. 선생은 인골들이 47년 전에 있었던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희생자 유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생은 즉시 군청과 면사무소로 신고했다.

이로 인해 평산리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잘못된 역사를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군청에서는 억울하게 죽어간 주민들을 위해 인골을 수습해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선생은 헌법으로 보장된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살기 위해 노력했다. 농업과 사업을 병행하면서 불편한 점이나 요구할 점이 있으면 정부와 공공기관 및 옥천군청, 충북도청 같은 지자체에도 수시로 공문과 전화를 보냈다.

이 선생은 농사 신기술 보급에 적극적이었으며 2001년에는 소형 풍력발전기를 제작해 가동하고 2002년에는 태양광 발전사업도 시작했다. 특히 태양광발전시설은 태양광 패널이 해를 따라 이동하도록 개량해 발전효율을 최대 80% 높였다. 이듬해인 2003년에는 민간인으로는 전국 최초로 태양광발전소 설립허가를 받았다. 이어 군민이 참여하는 시민 태양광발전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나서기도 했다.

우리 고장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지역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던 선생의 업적은 옥천 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인정받아 2003년 정부 신지식인으로 선정됐으며 2006년에는 ‘옥천군민대상’을 수상했다. 한국관광공사에서는 옥천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생을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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