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은(郭垠 : ~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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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은(郭垠 : ~1492)
  • 강형일기자
  • 승인 2021.07.0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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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은 선생 재실
곽은 선생 재실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이원면 강청리 출신이다.

 휘(諱)는 은(垠)이요 자는 안부(岸夫)이며 호는 용촌(龍村)이다. 고려조에 문하시중 평장사 선산군 휘(諱) 우현(佑賢)의 11대손이다. 모친은 진산 진씨이며 곽은 선생의 생년월일은 기록된 곳이 없다.

조선 성종때 문신으로 1465년 (세조 11년)에 생원시에 급제했으며 1472년(성종3년) 춘당대시(春塘臺試)에 문과 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담양부사 등을 지냈다.

1472년(성종 3) 춘장문과(春場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검교(檢校)로 등용되었으며 그해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1년에 지평이 된 뒤 헌납‧전적‧장령을 거쳐 1484년에는 전설사수(典設司守)가 됐다.

1487년에 특명을 받고 담양부사로 임지에 부임했다. ‘담양부사가 다스리기 어렵다’ 하여 상감이 선별하여 특병으로 제수되었다. 관직을 수행함에 있어 빙벽(氷檗 이가 시린 얼음을 마시듯 몹시 쓴 황벽나무의 껍질을 씹듯이 괴로운 생활을 참고 절개를 지킨다는 뜻. 충신·열사·지사·열녀가 충절이나 정절을 지키는 것을 말함)의 절조가 전후에 비할 바 없었고 선정덕치(善政德治)로 치적이 전국제일이었다. 양사제기문(養士齊記文)을 지어 인재를 양육함에 힘썼으며 향교에 보(寶)를 설치하여 흥학(興學)의 기반을 마련하여 가난한 선비를 육성함에 기틀을 마련했다.

백성의 노역을 가볍게 하고 조세를 적게 하며 교화(敎化)를 밝게 하고 예속(禮俗)을 두텁게 하며 사람들을 사랑함이 성심에서 나오니 부민이 진실한 사랑으로 추대 존경했다. 1491년 동부승지로 특승(特陞)되었으나 관아에서 급서 순직(殉職)하니 담양 부민들이 애통 망극하여 부모가 돌아가시어 상을 당한 것처럼 주육(酒肉)을 금하고 조상(弔喪)했다고 전해진다. 절의 바르기로 유명한 남효온(南孝溫)도 그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지어 후세에 남겼고 이이(李珥)도 그의 자손을 현인의 후예라 하여 등용할 것을 주청했다.

사진은 성종 때 담양 부사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낸 용촌(龍村) 곽은(郭垠)의 재실이다. 평면구조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팔작집으로 건축형식이 재실로서의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조선 시대의 치목 기법이 잘 나타나 있다. 전면으로는 반 칸 정도의 폭으로 마루를 두고 동쪽 1칸 온돌방 앞으로는 높은 마루를 두고 별도의 아궁이와 문을 설치하여 원경(遠景)을 보게 했다. 이 건물은 16세기 중엽에 건립되어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1894년 중수 후 1978년 수해로 인하여 복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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