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청산군 국채보상운동과 발기인 김존성과 전좌한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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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청산군 국채보상운동과 발기인 김존성과 전좌한 독립운동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4.02.2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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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여 국민의 경제적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최초의 민족적 경제 독립운동이었다. 이에 앞서 옥천군은 충북 최초로 독립협회 옥천지회를 창립해서 국권회복운동을 시작하였다. 또 1919년 3.1만세운동 때도 옥천군은 괴산과 함께 충북에서 제일 먼저 만세운동을 펼친 애국의 고장이다.


우리 고장 옥천은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 등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충청도 어느 고을보다 먼저 의병을 일으켜 외적을 물리치는데 목숨을 받친 올곧은 충의의 고장이다.

옥천 충북 최초 국채보상의무회 창립

전국에서 네 번째고 충북에 첫 번째로 옥천군(沃川郡)은 어느 지역보다도 빠르게 1907년 2월 말에「국채보상 옥천군의무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발기인회를 열었다. 이어 3월 8일 옥천군보상 단연(금연)의무회와 설립했고 3월 28일 이전에 김영주 등 7인도 청산군도 발기인회를 개최하였다. 대구 남일동에서 보상소를 열었고 국채보상 경남찬성회도 3월 14일, 금산군 3월 19일에 보상소사무실을 설립했다. 영동은 3월 23일, 보은은 4월 3일, 청주군은 4월 19일, 제천 호서협성회 5월 19일 각각 지역보상소를 설립했다.

청산군도 3월 하순 의연금 모금 시작

또한 청산군(靑山郡)에서는 김영주, 송익재, 송병심, 박승철 등 7명도 국채의연금 모집에 나섰다고 황성신문은 3월 28일 자와 대한매일신보는 4월 12일에 보도하였다. 황성신문에 ≪청산군 국채보상의무회 취지서≫는 다음과 같다. “나라 빚을 자신의 빚으로 생각하여 위로는 성상께서 밤낮으로 근심함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충직한 정성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요~<중략>~.”라는 애국심에 동참을 호소하는 취지서이다.


1907년 2월 초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 시작되자, 바로 3월3일 옥천군에서는 충청북도에서 최초로 옥천읍내 해창호 상점에서 정덕용과 김존성, 전흥규 참봉 등 옥천의 선각자 21명이 모여 옥천군 국채보상단연의무회 발기인 대회 개최하고 국채보상금 모금에 들어갔다. 

일본인 교사도 동참

옥천군 국채보상 의연금 모집 활동은 현지 일본인 교사의 참여로 이어지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옥천 국채보상단연의무회는 처음 23원을 모금하였고 점차 여러 면에서 참여했는데 그 당시 ≪황성신문≫에 보도된 1차 모금액은 105원 55전이고 2차 모금액은 19원 80전이었다. 이후 황성신문 1907년 5월 4일 황성신문 잡보는 옥천군 국채보상의무금 모금에 273인의 주민이 참가하여 모두 205만 55전을 거두어 집송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1일자에 실린 <청산군> 국채보상의무금 성금을 낸 분은 ▲청산군 원용구 등 4명, 4원 ▲청산군 상인 김치선 등 34명 14원 80전 ▲청산군 군내면 평상리(평상목), 이재민 등 5명 50전 ▲청산군 군내면 하지전리, 김종현 등 30명 6원 97전 ▲청산군 동면 수동, 이병도 등 20명 3원 35전 ▲청산군 읍저 부인 희사, 이윤근 부인 등 9명 2원 40전 ▲청산군 북면 법곡리(복우실), 신관수 등 9명 2원 60전 ▲청산군 나면 조분리, 안원묵 등 12명 1원 18전 또한 황성신문 1907년 3월 28일 자와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1일 보도된 <옥천군>과 <청산군> 국채보상의무금을 낸 명단은 ▲옥천군 군남면 박의영 서당동(서당골), 등 22명 2원 80전 ▲옥천군 군북면 갈평리(이평), 박씨 문중 1원 50전 ▲옥천읍내 박운오 등 2명 1원 50전 ▲군동면 조동, 동중과 동임 장덕근 2원 ▲군서면 월이자석 동중과 동임 김연산, 2원 ▲군남면 하리, 정진모 34명 10원 ▲청산군 국채보상회 홍재원 등 30명 18환 45전을 국채 의연금을 냈다.

발기인 김존성, 전흥규 손자 전좌한 독립운동 

김존성 선생은 1907년 2월 옥천군 국채보상단연의무회 발기인 전흥규 참봉, 정태국 정지용 시인 아버지와 함께한 21인 중에 한 분이다. 신한민보 1920년 4월 2일 신문보도에 “옥천군 독립당 김죤성 씨 등 수십 명이 검거되어 보은경찰서에 구금되었는데 보은 일경들이 고추 물을 코에 들어붓는 등 온갖 고문을 다해 고초가 심하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 김존성 씨는 바로 옥천국채보상운동 발기인이다. 또 “김존성 씨는 네브라스카 오마하에서 유학하는 김홍기씨의 숙부요. 그 집은 옥천읍이더라”라고 신한민보는 보도했다. 김홍기 선생은 미국 네브라스카로 유학가서 소년병학교 국어 교사 등 미주 독립운동으로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전흥규 참봉은 옥천읍 죽향리 출신으로 1905년 옥천 구읍에 설립된 사립 인명학교 간사로 활동했고 죽향초등학교 구강당 신축 때 일부 목재를 후원했다. 그는 국채보상운동에 3원의 성금을 내어 옥천군에서 성금을 낸 273인 중 세 번째로 많이 냈다.


그리고 전흥규 참봉은 1920년 상해임시정부로부터 총독부에 세금을 내지 말라는 ‘납세불납문서’를 받았다. 형의 손자 전좌한 지사가 이 ‘납세불납문서’를 인쇄하여 우편 배포하다가 1년 형으로 공주 감옥에서 1년간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등 경성 주요기관 폭파미수사건인 창의단 사건으로 양기탁 선생의 소개서를 갖고 만주로 망명 가서 만주독립단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또 5년간 옥살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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