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출신 대유학자 송시열 선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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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출신 대유학자 송시열 선생(3)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4.04.2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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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동지공 송기태와 생부 송시형

■양자 동지돈녕부사 송기태(宋基泰) 

대군 사부공 송시형의 친아버지는 습정 송방조(宋邦祚)이지만, 일찍이 송시형은 종숙 송희조에게 양자를 갔고 양가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따님이시다. 동지공 송기태(宋基泰)는 송시열 선생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송시형(宋時瑩)의 아들이다. 송기태는 친아버지 송시형(宋時瑩)과 어머니 파평윤씨 사이에서 4남으로 1627년(인조 7년)에 출생했다. 1711년(숙종 37년)에 84세로 생을 마친 조선 중후기 문신으로 자는 내백(來伯)이다.

 동지공 송기태는 헌종 때 음직으로 사산 감역을 하였다. 이어 익위사 부솔과 종6품인 위솔, 장원서 별제, 장례원 사평, 군자감 판관, 상의원 별제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강원도의 연창, 오색, 강선 등 15개 역과 역도를 관할하던 종6품인 상운도 찰방과 전라도 용암 현감(현재 전북 익산 인근), 은진 현감, 금산군수를 지냈다. 용안 현감으로 부임할 때는 대신의 상계에 의하여 왕께서 직접 임명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와 사계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奉祀孫)의 전례에 의한 것이다.

기사년인 1689년(숙종 15년)에 민비가 폐위되고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 선생이 문묘에서 출향되었다. 또한 노론의 영수 송시열 선생과 김상헌 선생의 손자인 문곡 김수항(金壽恒) 선생이 진도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두문불출하였다. 다시 노론과 소론이 집권한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에 종5품 평시서령을 제수받았다. 이어 군기시부정과 3품의 사도시정, 예빈시정으로 승진되었다. 도정을 거쳐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종2품 동지사가 제수되었다. 

송기태 동지공은 늙어서 자제들에게 집을 전하고 충북영동 심천면 초강리 대촌 마을에 거주하며 1711년에 5월 84세에 생을 마쳤다. 묘소는 처음 영동군 심천면 구탄리에 썼다가, 우암 선생 초장지인 수원 무봉산 만위사로 이장하였다. 부인 전주이씨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송시형(宋時瑩) 송기태 생부(송시열 양자) 

조선 중기 인조 때 문신으로 자는 유휘(幼輝)인데, 본관은 은진이고 그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현 대전)이다. 1592년(선조 25년)에 출생하여 1638년(인조 16년)까지 47세를 살았다. 아버지는 병조 좌랑을 지낸 송방조(宋邦祚)이고, 어머니 진주정씨이다. 양부는 첨정 송희조(宋熙祚)이고, 양어머니 파평 윤씨는 윤창세(尹昌世)의 딸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4촌 형으로 그의 4남 송기태(宋基泰)는 송시열의 양자가 되었다.

■인조 때 율곡 이이 문묘 제향운동 

 1633년(인조11) 42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1635년(인조 13년) 그는 성균관 유생의 연명 상소의 우두머리인 소두(疏頭)가 되어 성균관 유생 2백 70여 명을 이끌고,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 선생을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도록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문묘에 이황(李滉) 등은 배향되어 있었으나, 이이와 성혼은 동인의 반대로 배향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시형이 조정 바깥에서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조정안에서 사리를 따져 억울함을 밝힌 우암 선생이 변무소(辯誣疏)를 통해 송시형을 두둔하였다. 송시형과 송시열이 조정 안팎에서 두 분의 선생을 종사하도록 청하였으나, 인조는 반대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 활동

1636년(인조 14년) 청(淸)의 사신 용골대가 조선에 와서 청나라의 칸을 “황제”라고 부르도록 강요하자, 송시형이 성균관의 유생들을 이끌고 용골대를 즉시 참형할 것을 강력히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후금에 대한 적대 감정이 고조되자, 용골대는 만주로 가 버렸다.

이때 그는 장차 전쟁을 예감하고 큰 형인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榮)과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가려고 했는데, 1636년(인조 14년) 청나라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때 송시형의 큰 형인 송시영(宋時榮)은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함락당하자, 친구 이시직(李時稷)과 송시형의 장인인 윤전(尹烇)과 함께 자결하였다.

1637년(인조 15년) 송시형을 인조가 봉림대군(효종)의 사부(師傅)에 임명했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그 당시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와 청나라 볼모로 가야 하는데, 봉림대군 사부를 거듭 회피한다는 오해로 인조는 그를 하옥시켜 참혹한 형벌을 받게했다. 석방 된 그는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수십 일 만인 1638년(인조 16년) 1월 47세에 죽었다. 충청도 청주 남쪽 사현리 선영에 묻혔고 4촌 동생 우암이 지은 묘표가 있다. 부인 파평윤씨 사이에 4남을 두어 장남 송기선은 진사, 3남 송기명은 참봉, 4남 송기태는 중추부 동지사로서 송시열의 양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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