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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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1)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4.05.02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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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란 원형의 그리움이 잠자는 요람이 아닐까. 그렇다고 고향을 단순히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라는 그리움의 사전적 의미로는 설명할 수 없다. 애타는 마음에는 몇 곱절의 간절함이 내재해 있지만 고향의 이미지에는 ‘애타는’에 밴 강렬한 붉은색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애타다’, ‘간절하다’의 질감은 강렬한 원색이 어울리지만, 고향과 원색의 조합은 어쩐지 낯설지 아니한가. 이유가 무엇일까. 고향은 떠나버려서 아련하고 그립지만 닿을 수 없는 곳. 원색의 단순함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다면의 실체라 그러한가. 그리움이 아련함에 녹아 저 너머의 세상처럼 아득하여 모호한 회색의 질감으로 거듭나서 그러한가.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고여 있어 이토록 그리운가 보다. 엄마 젖가슴을 만지며 잠들던 유년의 내가 있고 젊은 엄마가 있는 곳. 총총한 시간을 함께했던 친구가 있는 그곳은 텅 비었으되 꽉 찬 세상이다. 고향은 생각만 해도 긴 겨울밤 항아리 속에 쟁여둔 홍시를 꺼내먹듯 입안이 달다. 무엇이든 처음 접한 것에 대한 각인은 무서울 정도다. 첫경험은 뒤따르는 모든 경험을 압도한다. 설사 잘못 입력된 기억이라도 바로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던가. 지워지지 않는 첫 경험의 성지이기에 우리는 그토록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보다. 내 정서의 원천은 고향에서 비롯되었다. 색깔로 치자면 엷은 회색이다. 집 앞에 커다란 ‘좌이산’이 있었다. 눈을 뜨면 산허리를 둘러싸고 차오르는 포근한 훈김을 마주하며 자랐다. 이제 막 김을 내보내기 시작한 밥솥의 눈물 같은 연회색. 흰색도 아니고 검정은 더더욱 아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련한 안개 속 같은 엷은 회색이 그때부터 내 안에 자리했다.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순간에 은은히 퍼지던 엄마의 자장가 같은 엷은 회색은 사는 내내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진정제였다. 뒤처질까 마음이 조급할 때 워워 쉬어가라 청하는 것도 엷은 회색이었다. 좌이산을 감싸던 은막의 위로가 잰걸음을 고쳐 세우곤 했다. 들에 나갔다가 돌아올 저녁 무렵 굴뚝마다 피어오르던 연기도 엷은 회색이었다. 윗집 은아네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오르면 그때부터 마음이 부풀기 시작했다. 먼저 시작한 굴뚝은 다른 굴뚝을 불렀고 동네는 하얀 연기를 수없이 피워 올렸다. 고단한 몸이 안식하던 집은 엷은 회색의 아늑함에 감싸여 평화로웠다. 어쩌다가 해가 이울기도 전에 뒷집 굴뚝이 기침을 하면 마음이 조급했다. 방앗간에 떡 하러 온 손님들로 우리 집은 저녁까지 분주했다. 엄마는 떡을 만드느라 밥때를 넘기기 일쑤였다. 엄마가 돌아와야 우리 굴뚝도 엷은 회색의 평화에 동참할 수 있을 텐데,  저녁 무렵 찾아오는 손님이 방해꾼 같아 눈을 흘기기도 참 많이 했다.  몸뻬에 묻은 쌀가루를 털어내는 엄마의 소리가 들리면 마음은 벌써 굴뚝으로 향했다. 아슴아슴 피어오르는 연회색 뭉게구름에 행복이 주렁주렁 매달릴 상상에 벌써 배가 불러왔다. 엷은 회색은 엄마의 눈빛이고 사랑이고 포만감이고 행복이었다. 헤살거리는 시냇물 소리에도 은빛 내음이 났다. 학교를 가려면 고개 하나는 넘어야 하는데 고개를 넘어서면 계곡에서 흘러온 시냇물이 작은 바윗돌에 부딪혀 주춤거렸다. 그럴 때마다 은빛 물살이 튀어 올라 바위를 찰싹거렸다. 바윗돌을 들을 깨우는 정겨운 소리에 소곤대는 친구들이 생각났다. 어제 헤어진 친구가 벌써 그립고 그들과 시냇물처럼 속살거리고 싶어마음이 발걸음을 앞질러 달려가곤 했다. 은회색 서리가 주단처럼 깔려 있어 겅중겅중 뛰어도 숨차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음을 깨고 결 고운 봄물이 졸랑졸랑 흐르는 시냇가에서 시간을 잊고 물장구를 쳤다. 봄맛을 원없이 들려주겠노라 벼르는 당찬 시냇물 소리에 문득 아득해지곤 했다. 눈앞에서 흐르는데 소리는 재 너머 교회에서 나는 종소리처럼 은은함이 배어 있었다. 낭랑한 종소리가 아직도 꿈결에서 들리는 걸 보면서 그곳의 힘이 얼마나 센지 새삼 놀라곤 한다. 정의가 힘을 잃고 반칙이 기세가 좋을 때 불끈거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앞산의 지엄함이 앞서는 다리를 붙들어 주었다. 자연의 순리를 몸소 보여주는 그것은 들끓는 마음을 연회색으로 숙성시켰다. 사는 내내 시선을 먼 곳에 두는 법을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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