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그리는 농민의 내일 ‘구미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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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그리는 농민의 내일 ‘구미농원’
  • 박현진기자
  • 승인 2018.05.1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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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는 연구·개발…특허·인증 품종도 다수
70년 세월, 목표는 하나…“농민 잘 살았으면”

1939년 첫 묘목을 생산하고 2005년 유일한 묘목산업특구로 지정된 이래 연간 240여㏊의 묘목밭에서 전국 생산량의 40%가량인 1200여만 주의 묘목을 생산하고 전국 묘목거래량의 70%를 담당하고 있는 이원묘목산업단지. 모든 것에 뿌리가 있듯이 이원묘목단지에도 터줏대감이자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선구자가 있다. 1950년대 초 故 김일태 선생의 손으로 일궈내 현재의 김영(50) 대표에서 손자 정현(25) 씨까지, 3대가 이어가고 있는 구미농원(옥천군 이원면 미동1길 61-11)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원조’ 혹은 ‘오랜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고 20대 청년까지 합세해 꿈꾸는 미래가 있기에 3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김 대표. 그를 만나 구미농원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팔미 복숭아
구미농원 김영 대표가 15여 년에 걸쳐 연구 개발한 저장성 높고 당도·경도 또한 높은 신종 복숭아의 이름이다. 그렇다. 김 대표는 묘목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은 이제는 1차원적인 문제라고 했다. 묘목농원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고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상이라고 했다. 나만의 독특한, 구미농원만의 특별한 ‘인증품’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생각했단다. 일시에 대량 수확한 복숭아가 비가 오거나 한꺼번에 유통이 안 될 경우 일주일만 지나면 누렇게 변해 폐기시켜야 하는 상황을 보고 어떻게 하면 저장성을 높일까 고민했다. 1900년대 후반 시작한 연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 2008년 육미 복숭아(6월 생산) 특허를 취득한 데 이어 2013년 그보다 더 우수한 육종의 팔미 복숭아(8월 생산) 인증에 성공했다.

김 대표만의 ‘팔미 복숭아’ 생산과 유통으로, 소위 말하는 ‘대박’을 맛본 농민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쉼 없이 연구를 거듭하고 육종을 개발하고 있는 이유다. 그는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구미농원의 명성을 드높이자고 하는 개발이 아니다. 내가 개발한 특허품으로 옥천과 전국의 농민이 잘살았으면 하는 게 간절한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농민이 잘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묘목농사를 처음 시작한 선친 故 김일태 선생의 뜻이라는 것.

 

▲주말이면 농원으로 묘목을 구입하러 오는 가족단위 고객들로 구미농원은 늘 분주하다.

△“땀 흘리지 않은 돈은 없다”
1950년대 초반 문을 연 구미농원의 창업주는 8년 전 타계한 故 김일태 선생으로, 1926년 이원면 구미리 출생이기에 ‘구미농원’이라 이름 지었다.
그는 대한민국 유일의 묘목산업특구로서 전국 생산량의 40%가량을 생산하고 전국 묘목거래량의 70%를 담당하고 있는 이원묘목시장의 뿌리이자 원조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농민이 잘살아야 한다며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은 묘목 직거래를 시작한 장본인이다.
또한 농촌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많아 농촌청년의 이농을 막기 위해서는 방위산업체 근로청소년들의 병역면제와 같은 획기적인 농촌살리기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며 여기저기 진정서를 내고 목소리를 높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김 대표는 “국민대 1기 총학생회장 출신의 인텔리였던 선친은 아주 호탕하고 담대한 분이셨다”며 “다른 어마어마한 일을 하셨어도 충분했을 분인데 할아버지의 ‘농촌을 지켜라’라는 한마디에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와 어려운 여건에 있던 고향 농촌에 인생을 묻었다”고 회고했다.

그런 선친의 2남 5녀 중 큰아들로 태어나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묘목밭의 흙을 밟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부터 배웠다는 김 대표. 그의 선친은 ‘땀 흘리지 않은 돈은 없다’며 늘 깨어있고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단다.
어느 날에는 자동차 한 대와 함께 모아놓은 명함 300여 장을 내주며 일일이 인사드리고 오라고 했단다. 전국을 다녀야 하는 ‘20대 아들의 안전’을 위한 자가용이고 미래 사업주로서의 인간관계 형성을 고려한 명함 300장이었다고.
또 어느 해에는 만 원짜리 3750만 원이 든 돈 봉투를 주며 묘목을 사오라고 시켰단다. 아무런 교육이 동반되지 않은 ‘무조건적인 지시’를 몇 회 거듭하면서 김 대표는 스스로 거래하는 법과 요령을 깨우쳤다고 했다. 그렇게 선친은 김 대표에게 기회만 제공해주고 스스로 깨우치길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 김 대표가 이제 외아들 정현 씨에게 “젊은 네가 꿈꿀 수 있는 미래를 설계해 보라”고 가르친다.

 

▲구미농원 창업주인 故 김일태 선생의 생전의 활동기록.

△1대는 창업주, 2대는 계승자, 3대는 또 다른 창업자
정현 씨는 부친인 김 대표의 연구개발에 동참하며 이론적 체계 적립을 위한 문서화 작업과 특허권 등 인증 취득에 주력함과 동시에 특허품목들의 홍보 및 유통, 마케팅 체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20대 중반의 열혈 넘치는 청년이라기엔 너무도 당당하고 어른스러운 그는 “아버지는 저에게 아버지가 실패한 것에 대해선 하지 말라고 주입하신다. 대부분 경험에 의한 산교육이라 수긍하지만 때로 방향만 선회하면 가능할 것 같은 일들에 대해선 과감하게 밀어 부친다”고 당차게 말한다.
3대로 이어지는 구미농원에 대해선 1대는 창업주이고 2대는 계승자라면 3대는 또 다른 창업자라고 말하는 정현 씨. 할아버지, 아버지가 쌓아놓은 치적을 바탕으로 시대에 걸맞는 미래설계가 동반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농원은 많아지는 데 청년은 줄어들고 있다. 청년은 떠나고 농민은 살기 어려운 레드오션 상황을 블루오션으로 바꾸는 게 나의 꿈”이라며 “20년, 30년 지난 후 2, 30대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내 성공사례를 이야기하며 귀농·귀촌 전향을 선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포부를 밝혔다.
어려서부터 농원의 흙을 밟으며 나무와 함께 자라선지 오로지 농원의 일에만 관심이 있다는 정현 씨는 연애나 결혼에도 아직 뜻이 없다고 했다. ‘돈을 좇지 마라. 인생에 거쳐 가는 시간(또는 직장 등)이란 없다.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다 보면 부와 명예는 저절로 따라온다’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새기며 농원에 뭔가를 이뤄놓고 난 다음에 이성에도 관심을 가지겠다는 얘기다.

△“농민이 잘살았으면”
창업주 故 김일태 선생은 1950년대 말 농림부가 보증한 종묘전문인 제2호이고, 김 대표는 중부대 임학과를 졸업한 종묘 1급 자격증 소지자이며, 정현 씨는 제대군인으로 배재대 조경학과 재학중이다. 3대가 전문 ‘나무꾼’인 셈.
시·공간적 차이로 인해 추구하는 방향이나 각도는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나무가 잘 자라고 숲이 울창하길 바라는 ‘나무꾼’으로서의 바람은 70여 년 세월의 간극에도 다르지 않은 이유다. ‘원조’나 ‘터줏대감’이 아닐지라도 스스로 개발한 품종으로 모든 농민이 함께 잘살기를 바라는 20대 젊음이 함께 하기에 구미농원이 또 다른 70년을 꿈꾸는 이유이기도 하다.
늘 미래를 준비하는 구미농원. 구미농원은 육미, 팔미 복숭아 외에도 장미처럼 피어나는 향기나는 커다란 매실나무인 ‘대홍’의 특허권도 갖고 있다. 현재는 종이컵 크기의 ‘살구’와 추위에 강한 국대접 크기의 ‘단감’을 개발하고 있다는 김 대표와 정현 씨. 이들이 있어 옥천 묘목과 묘목 농민들의 꿈과 희망이 더 단단해지리라 기대해 본다.

▲2013년 취득한 팔미복숭아 특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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