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향수」의 ‘얼룩백이’와 ‘칡소’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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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향수」의 ‘얼룩백이’와 ‘칡소’ 논란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6.0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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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정지용 「향수」의 ‘얼룩백이 황소’는 ‘칡소’가 아니다. 더 깊은 논의가 뒤이어 따르겠지만 적어도 ‘얼룩백이 황소’를 ‘칡소’라고 단언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학계나 문헌을 통한 고증과 비판의식 없이 ‘~일 것’이라거나 ‘~라더라’라는 남이 ‘바담풍’하니 우리도 ‘바담풍’하며 무조건 따르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모 언론에 “정지용 「향수」에 나오는 ‘얼룩백이 황소’를 ‘칡소’로 해석, 칡소를 육성”하려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깜짝 놀랐다.

바로 관련 기자와 관계자 등에 언지를 주었다. 잘못된 것이니 다시 살펴보기를 바란다고.
수선스럽게 진행된 잘못된 사업들과 간혹 마주할 때가 있다. 이런 사업들이 초래하는 주민들의 혼란은 생각보다 컸다. 이후 그들이 사업의 관계성과 정지용 시 해설의 잘못 등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에는 많은 행정력과 노력 등이 이미 소모된 후일 것이다. 그러니 행정력 낭비와 경제적 가치를 재는 재화의 손실이 많았던 경우와 종종 맞닿아 있을 때가 있다.

서울대학교 축산과를 졸업한 김진수(『칡소를 묻다-토종 얼룩소에 대한 왜곡과 진실』, 도서출판 잉걸, 2015, 164~165쪽)에 의하면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의 얼룩소는 ‘칡소’가 아니라 적갈색 몸체에 두드러진 하얀 얼룩을 가진, 말 그대로 그냥 얼룩소. 얼룩소가 칡소로 둔갑 → 1938년 일제가 ‘조선우심사표준’ 제정 조선우 모색은 적색 → 2006년 농촌진흥청이 가축유전자원 발굴보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칡소’와 ‘흑우’ 주목 추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고구려 안악 3호분의 ‘얼룩소’뿐만 아니라 박목월의 ‘얼룩 송아지’와 이중섭의 작품에 나타난 ‘소’ 그리고 정지용 「향수」의 ‘얼룩백이 황소’도 ‘칡소’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황망함에 ‘칡소’ 탐색 과정에서 목도한 현실은 불편”하였다고 토로한다.

박목월은 한양대 국문과 교수시절에 펴낸 『동시의 세계』(배영사, 1963)에서 “시가 우러나오는 근원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그리움”이라며 “「송아지」에 나오는 송아지는 바로 자기 자신이며 그의 아우들”이라고 피력했다. 이후 그는 “뒷산에는 목장의 얼룩박이 젖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동시의 세계』, 서정시학, 2009, 214쪽)며 계성고보 시절 지은 「송아지」의 송아지는 스스로 ‘젖소’라고 밝혔다.

또 이중섭의 소를 담은 작품은 “울부짖고, 떠받고, 싸우고, 피투성이가 돼 몸서리치게 만드는 처절함에 더해 화면마저 꽉 채워 그린 소. 그런 소는 이중섭의 고뇌와 번민, 회의와 절망 속에 마음의 여유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치열한 현신”일 것이며 “그의 모진 삶과 함께 야수파적 표현주의 화가”로 부르는 근거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하물며 ‘조선의 자연과 조선인의 감정’을 시로 표현한 시어 제조기 정지용이 겨우 칡소를 ‘얼룩백이 황소’로 표현하고 말았을까? 정지용이 시 이외에도 산문이나 평론 등도 많이 썼다. 그러나 아직 ‘얼룩백이’에 대한 단서는 찾지 못하였다. 정지용도 박목월처럼 ‘얼룩백이’에 대한 실체를 구분 지어줬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그런 일련의 작업 없이 홀연히 떠났다.
그래도 정지용의 ‘얼룩백이 황소’를 ‘칡소’로 속단하는 것은 과도한 비약으로 보인다. 이는 1930년대 이미지즘 등에 심취해 있던 정지용의 시적 작법에 크게 누가 되는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감각적 이미지를 중시하였던 정지용의 시풍과 관련 ‘얼룩백이 황소’는 정지용의 궁극적인 언어처리 작업의 일환으로 보고자 한다. 이를 선명한 이미지 광폭의 큰 손짓으로 귀결 지어 정지용 연구에 매진하고자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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