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구읍 고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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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구읍 고택 (1)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0.04.02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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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옥천구읍의 유서 깊은 고택들은 옥천의 훌륭한 주거문화유산이며 문화관광자원이다.


옥천인 들의 유구한 역사적 자긍심과 정체성이 들어 있는 소중한 옥천의 문화자산이다. 옥천 구읍은 조선시대 옥천군의 500년간 군청소재지로 관청인 관아와 객사, 교육기관인 옥천향교가 위치하였고 경제 중심지로 오일장이 열리는 읍내장터가 있던 곳으로 옥천군의 행정, 교육,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적지 않은 고택들이 있다.


옥천구읍의 고택들은 그런대로 원형이 잘 보존된 건물로는 김선기· 고재만 가옥과 춘추민속관, 아리랑 고택, 구군수관사이다. 그리고 이필수 고택은 목재의 기본 골격과 구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 구조는 현대식 주방과 보일러 시설을 개량하였으나 보존이 잘되어 있다.


그 밖에 전좌한 생가 등은 경량식 양철기와 등으로 개수했으나, 더 실태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 1919년 3월 19일에 일어났던 옥천 읍내 즉 구읍 3.1만세운동으로 격양된 조선인들의 군청사 안전을 우려하여 교통이 편리한 조선총독부 산하 옥천군청을 구읍에서 옥천역과 옥천헌병분대와 가까운 삼양리 보건소 터로 이전하였다.


현재 옥천구읍 죽향리에는 조선시대 군수가 사택인 구군수관사와 바로 남쪽 인근에 관청 건물로 추정되는 이필수 고택이 있고 이 고택 바로 남쪽에 중국인 조선족 김00 소유의 한옥이 있다.


옥천구읍사거리 부근 죽향리에는 1920년 대부호 김기태 선생이 살았던 김선기·고재만 가옥이 각각 위치한다. 그리고 고재만 가옥 뒤편에 지붕만 경량 양철기와로 개량한 고택과 옥향아파트 동편 재룡산업 사택 부근에 독립운동가 전좌한 의사의 생가도 지붕만 경량 양철기와로 개량하였다.


옥천읍 문정리 11번지의 아리랑 고택은 대한제국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ㅁ자형 고택으로 안채와 별채가 있고 안채에 문이 동·남·북향에 모두 3개인 것이 특징이다. 동문 쪽에 사랑채와 머슴방 1칸이 있는 별채가 있으며 마당에는 연못이 있다. 안채는 본채와 양쪽 날개채, 문간채로 이룬 남향집, 본채는 정면 5칸에 측면 1칸 반인 홑처마 팔자 형 기와지붕이다.


이 아리랑 고택은 문정리 원로인 한국전쟁 참전전우회 유오길(당시 80세) 읍 분회장이 2013년 7월에 필자에게 “이종승 씨 선친이신 이 참봉께서 사시다가, 애국계몽운동가인 오상규 선생이 부인과 사별 후 작은 부인과 함께 살았던 집이었다”고 구술하였다.


그는 대한제국 때 철도국장과 시종원부실장을 지냈고 경술국치 후 옥천 구읍 하계리 샘실 마을로 이사와 살다가 이곳 아리랑 고택에서 살았다. 현재 한식 음식점으로 사용된다.


죽향리의 김선기· 고재만 고택은 1918년에 진주 갑부이며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 이사였던 김기태 부호가 건축하였고 죽향리 김선기 고택은 남향받이에 ㄱ자형 홑처마 팔자 형 기와지붕이며 가구형식은 1고주 7량 가의 민도리집으로 대들보 굵기가 매우 크며 백두산 목재로 알려졌고 잘 보존되었다.


고재만 고택은 김선기 고택에서 동측 담 하나 사이에 위치하며 팔자 형 기와지붕으로 안채의 동편 별채는 따로 문간채가 딸린 김기태 저택의 사랑채 역할을 했다.


유리창이나 치목에서 근대적 기법이 나타나는 근대 중부지방 가옥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940년대 옥천읍 오대리 보네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한치봉 선생이 매입, 1944년 개교한 옥천여자전수학교에 기부하고 옥천여중고의 모태로 옥천 여성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오상규 선생이 살던 구읍 아리랑 고택
▲오상규 선생이 살던 구읍 아리랑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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