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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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의 추억
  • 김기순 수필가
  • 승인 2022.03.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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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고창 청보리밭에 다녀왔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린시절 보리밭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놀았다. 학교 가는 길에도 동네 어귀에도 장에 간 엄마 마중 가는 길옆에도 보리밭 초록 물결이 넘실거렸다. 

옛날에는 흔하디 흔한 것이 보리밭이어서 구경거리도 못되었거니와 볼거리라 할 수도 없었다. 고작 깜부기나 뽑아 먹고 숨바꼭질의 은신처였던 신기할 것도 별날 것도 없는 일상 속 풍경이었다. 그런 보리밭을 관광특구로 만들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지면서 어쩌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를 보리밭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한 발상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쌀이 귀하던 시절엔 보리쌀이 주식이었다. 쌀이 풍족해지면서 자연히 보리를 멀리하게 되었고 경작에서도 밀려났을거라 짐작된다. 아무튼 내 뇌리 속에서도 잊혀진지 오래인 보리밭이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다. 간절하도록 그리운 친구도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만나고 보니 감회가 새롭고 새삼 정다움이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어린 시절 나는 보리음식을 무척 싫어했다.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것은 보리밥과 보리죽이다. 아침에 도시락을 열어보고 보리밥이 들어있으면 슬며시 도시락을 내려놓고 학교에 갔기 때문에 점심을 굶는 일이 허다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아플 때 어머니가 끓여 주던 보리죽이다. 끙끙 앓고 있는 딸에게 후후 불어 한술 뜨라던 어머니. 지금은 어머니가 끓여주는 보리죽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데 그때는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입안에서 깔깔하게 뒹굴던 보리알이 왜 그리 얄밉던지. 

보리밥 보리죽 말고도 싫어하는 음식이 또 있다. 보리개떡이다. 내 생일은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음력 6월이다. 어머니는 내 생일날 강낭콩을 드문드문 넣은 보리개떡을 쪄주셨다. 거무튀튀한 보리개떡은 볼품도 없거니와 맛도 없었다. 막내딸 생일날 찰 무리떡과 흰 쌀밥에 소고깃국을 왜 아니 해주고 싶으셨을까. 그런 어머니의 속도 모르고 맛도 없는 보리개떡을 뭣 하러 찌느냐며 투정을 부리던 철부지였다.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 보리이삭 줍던 일이 생각난다. 밀레의 그림은 세 명의 여인들이 한가로이 이삭을 줍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뙤약볕 내리쬐는 빈 보리밭에서 이삭을 줍는 일은 고된 일이어서가 아니라 지루하고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노라면 금방이라도 달려가 안기고 싶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기억하기조차 서어한 것들이 있다. 보리 역시 들춰낼 만한 추억거리가 못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 그리움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줄줄이 끌려 나오는 보리의 추억 앞에서 뭉클하니 눈가가 촉촉해진다. 추억이란 그 형태소가 어떤 것이든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에는 연례행사처럼 보리밟기를 했다. 보리는 한로와 상강 무렵에 파종해서 동한의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는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다. 한겨울 땅이 얼면서 자칫 뿌리가 들뜨지 않도록 보리 싹을 밟아 주는데 아버지는 보리밟기를 따라 나온 막내딸이 추울세라 업어주셨다. 보리밟기를 떠올리면 눈발 흩날리던 들판과 차가운 바람과 비릿한 보리 싹 내음과 함께 아버지의 따뜻한 등이 먼저 떠오른다. 

보리로 만든 음식 중에서 유일하게 좋아했던 것이 하나 있다. 풋보리 미숫가루다. 겨울 곡식이 떨어지는 봄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기를 보릿고개라 했다. 보리를 수확해야 양식을 장만하는데 그 보리 수확을 기다리기까지의 기간이 굶어 죽을 만큼 힘겨워 보릿고개라 했던 것이다. 
보릿고개에 어머니는 풋보리 미숫가루를 만들어 주셨다. 보리가 채 익기 전에 풋보리를 잘라다가 가마솥에 쪄서 볶아 미숫가루를 만들었는데 풋보리 미숫가루는 여느 미숫가루와 비교할 수 없는 향긋하고 고소한 맛이었다.

보리는 쓰임새도 다양하고 영양 면에서도 으뜸이라 하여 곡물의 왕이라 불린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특별식이라며 보리를 이용한 음식들이 인기가 좋다. 

보문산 자락 보리밥 식당은 항상 등산객들로 붐빈다. 나 역시 즐겨 찾는 곳이다. 양푼에 보리밥을 담고 고추장에 쓱쓱 비벼 열무김치를 얹어 먹는 보리비빔밥은 꿀맛이라기보다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맛이랄까. 아무튼 흰 쌀밥에 물린 입맛을 되찾아주는 데는 구수한 보리비빔밥만 한 음식도 없지 싶다. 

청보리밭에 다녀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바람결에 출렁이던 드넓은 초록 물결이 어쩜 이리도 오래도록 나의 심상을 잡고 놓지 못하는지. 아련한 어린 시절을 가만가만 흔들어 깨우는 청보리밭 여운에 초여름 목 밑이 설렘으로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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