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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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다가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22.12.1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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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여유로운 휴일, 따사로운 햇살이 창안을 서성이는 아침이다. 창문 넘어 말쑥한 겨울 산들이 그림처럼 얌전히 펼쳐져 있다. 지난 가을 말려 두었던 국화차를 우렸다. 향기가 집안 가득하다. TV에서 경로당 할머니들의 일과가 방송 중이었다. 보고 있자니 얼마 전의 일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20여 일 전 예기치 않았던 피치 못할 사고로 인근 병원에 5인실에 환자 한 명이 입원해 있는 병실에 두 번째로 입실했다. 살면서 늘 먼발치에서만 보고 병문안 차 몇 번 와 보았던 병원, 오늘은 내가 환자복을 입고 며칠 신세를 지고 묵어갈 판이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나름 종합병원. 성냥갑을 몇 개 쌓아놓은 듯 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색 건물. 오래된 탓일까, 대 명절 구정이 다가와서일까, 철제 창문은 빈틈을 보이지 않고 굳게 닫혀있지만 왠지 숭숭 뚫려 있어 바람만이 감돌았다. 그곳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칙칙해 보였다. 

5층 513호 병실에 입실한 환자들은 질병으로 며칠 만에 나가는 환자, 교통사고 환자, 산재환자 등이 있었다. 우리 방에서 선임 방장은 일하다가 넘어져 허리가 부러져 수술하고 두 달째 입원 중이었다.

사고 시 놀라서인지 이틀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정신없이 공허한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첫날은 방장 언니와 둘 뿐이었는데 삼일째 되는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실 된 환자는 모두 4명이 되어 있었다. 어김없이 아침이 오고 해가 졌다. 1월 하순의 아침 7시는 어둠이 다 가시지도 않은 새벽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떨그럭 덜컹거리며 내려오는 밥차 소리가 났다. 반찬 냄새가 나고 묵직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온다. 순간,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들어오고 “아침밥 드세요” 밥차 아주머니의 낭랑한 목소리가 어둠의 침묵을 깨고 활기를 불어넣는다. 

방장 언니의 “어이구 밥맛없어” 짜증 섞인 투정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밥알이 모래알 같아”의 시작으로 다들 일관성으로 공감하며 투정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이때 신음인지 내 귀를 의심했다. “아이구 배고파 밥 좀 먹었으먼 좋겠네” 하는 소리에 병실 안, 우리는 누구 먼저라 할 것 없이 놀라서 커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졌다. 조금 전까지 입맛 없어 못 먹겠다는 투정이 갑자기 숙연해졌다. 바로 옆 침대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2일 전에 입원해 맹장 수술을 한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할머니 진지 드시고 싶으세요?” 하고 말대답해주었다. 커튼 안 할머니께서는 “난 3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굶어서 배가 고파 죽겄어! 밥 좀 먹었으면 좋겠네” 애절하고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하였다. 먹고 싶어도 못 먹는 배고픈 사람을 옆에 두고 여유 있는 자의 투정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할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점심때에는 분명히 밥 드릴 거예요” 진심 어린 위로의 말을 했지만 간절히 배가 고팠던 할머니가 얼마만큼 받아들였을지. 그렇게 갈망했던 점심은 야속하게도 또 건너뛰고 비로소 저녁에서야 겨우 쌀죽이라며 반찬 그릇까지 다 먹어 치울 기세로 순간의 물에 말아 후딱 먹고는 더 먹고 싶다며 힐끔거리던 할머니. 다음날도 한풀이라도 하듯 3끼의 식사를 국물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드셨다. 밥을 먹고 싶다는 할머니를 위해 서로 밥을 덜어주었다. 

그렇게 하루를 안정적으로 지내는가 싶었던 할머니는 어제와는 정반대로 살만해졌는지 밤낮을 전세를 냈는지 화장실을 독차지하고는 들랑날랑 거리며 “아이고 큰일이네 큰 것이 안 나와” 거시기가 아파 죽겠다며 간호사 호출 벨을 연신 눌러댔다. 의사와 간호사가 다녀가며 “할머니 너무 힘주면 맹장 수술한 데가 터져요 살살 힘주세요.”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했다. 병실 안 관심사는 할머니의 큰 것에 다 쏠려 있었다. 화장실에서 잠을 자는지 한참을 머물다 나오면 우리는 다른 화젯거리로 이야기하다가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일제히 “어떻게? 보셨어요? 나왔어요?”의 두 단어를 외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주문을 외우듯 “아이쿠 죽겄네 안 나와, 어떡햐” 그러기를 꼬박 하루 반이 걸렸고 5, 6번의 관장을 거치면서 할머니의 표정은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예기치 않았던 이번의 일로 며칠 동안 스쳐 간 만남의 인연들, 덕분에 웃고 위로가 되었던 병실 동료 환자들과 의사 선생님, 특히 미의 기준으로 채용이 된 듯한 미모의 간호사 선생님들께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또 생각만 해도 웃음을 주었던 그분 76세 할머니! 건강히 오래 사시길 바라며 다시 한번 더 감사를 드린다. 아마도 할머니께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받아본 상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마운 상은 밥상이 아니었을까? 굶주려보지 않았던 자의 배부른 여유는, 그때 할머니의 3일간 먹지 못했던 진정하고도 간절했던 절규에 가까운 배고픔의 그 심정을 느껴보지 못했을 터. 누구나 간절한 갈증을 느껴본 자만이 그 갈증의 참맛을 느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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