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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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81)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12.29 12: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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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남편인지라 시동생과 동서의 수고를 위로하는 여행을 생각한 것이다. 속초에서 하루는 바다낚시를 갔다. 한 시간 배낚시를 나갔는데 낚싯 줄을 던지고 가볍게 들었다 놨다 하면서 고기를 낚아야 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내가 계속 서 있자 남편이 내 뒤에 있는 동파이프가 깨끗 하니 그 파이프에 걸터앉아 낚시하라고 권했다. 

다리도 아픈데 잘됐다 싶어 동파이프에 앉아서 한 시간 정도 낚시를 했다. 물고기도 꽤 잡았고 한 시간이 되어 뱃머리를 돌려 돌아가기 위해 선장이 막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내가 걸터 앉아있는 쇠파이프가 홱 돌기 시작했고, 순간 나는 그대로 배 바닥 뒤 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야말로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서 아무도 선장이 시동 거는 것과 내가 앉아 있는 파이프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바닥에 뒤로 나동그라진 나는 정신이 나간 듯했고, 몸을 움직여보려고 해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아, 내가 살아나도 남은 인생은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신세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겨우 눈을 떠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파란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뿌연 회색빛의 앞날로 꽉 들어찼다. 꼼짝 못 하고 누워있는 나보다 더 놀란 것은 남편과 시동생 부부 그리고 둘째 아들이었다. 선장은 허둥지둥 배를 몰아 뱃머리를 대고 네 사람이 나의 팔다리를 들어 올려 자동차에 싣고서 속초병원 응급실로 내달렸다. 

엑스레이와 CT를 찍고 보니 다행히도 척추를 다친 것은 아니었고, 의사는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염좌와 타박상으로 요통이 심해 우선은 활동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척추손상이 아닌 것만으로 하반신 마비는 면했구나 하며 다행스러워했지만, 극심한 허리 통증으로 걸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서울로 돌아와서 신경외과, 정형외과, 한방병원 치료를 병행해서 별의별 치료를 다 받아보았지만, 잘 때는 돌아누울 수도 없고 혼자 일어나는 것도 힘들 만큼 통증이 심했다. 

보름 후에는 뉴욕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 애가 탔다. 출장을 미룰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출장 일주일 전까지도 물리치료와 한방치료를 받았지만, 통증이 완화 되지 않아 사혈 요법을 했다. 사혈을 하고나니 신기하게도 허리를 펴고 절뚝거리지 않고 걸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대로 뉴욕 출장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출산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고, 고속도로 10중 추돌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배 사고로 허리를 못 쓰게 될 뻔한 사고 등 남들은 평생 한 번도 당하지 않고 사는 큰 사고를 세 번이나 당하고도 살아남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시지 않고는 이렇게 살려 놓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다 하기 전에는 죽음이나 장애를 허락하시지 않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남보다 체력이 약하고 또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이 여전히 나와 함께 더불어 살고 있지만, 그런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축복 또한 주신 것 같다. 

내 책상 앞 벽에 걸려있는 ‘보왕삼매론(寶王 三昧論 )’을 올려 보며 곱씹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 니 병고로서 양약삼으라.”

사랑하는 어머니께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시고, 그때는 그리움이 그리도 큰 것인 줄 몰랐습니다. 때로는 앉아서, 때로는 누워서, 때로는 기쁠 때, 또 슬플 때 문득문득 그렇게 가슴 아프게 어머니가 보고 싶을 줄은 어머니 살아생전엔 몰랐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지고 싶어도 손 한번 만져볼 수도 없는, 그저 어머니라는 이름만 덩그러니 제게 남겨져 이리도 그리움이 아픈 것일 줄은 더 몰랐지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어머니는 영원히 함께해 온, 영원히 함께할 것으로만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질 때면 볼 수 없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저 뜨거운 눈물만이 볼을 적실 뿐입니다. 

이 세상 어느 어머니보다 곱고 여리던 갓 서른에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신 뒤 저희 4남매를 부둥켜안고 얼마나 뜨거운 눈물로 그 많은 날을 지내셨는지요? 어찌 지금 제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흘리는 눈물을 같은 눈물이라 하겠습니까? 

시집가면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을 살아야 한다던 그 시절 그 피난살이를 어떻게 사셨을까? 그 시집살이를 어떻게 견디셨을까? 그 힘든 세월을 버티어내시느라 어머니 가슴은 속이 까맣게 타 버린 검은 숯덩이가 되셨겠지요? 누구에게 그 한 많은 사연을, 잠 못 이루는 밤의 외로움을 함께 나눌 단 한 사람도 없는 막막한 세상에서 말입니다. 

오해를 받아도 입이 없으셨고 서러워도 눈물 훔칠 처지도 아니셨지요.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했고, 말이 없으니 호된 시집살이에서 느는 게 눈치밖에 없어 눈치로 살 수밖에 없으셨지요. 눈치로 살다 보니 오해투성이로 서러움이 떠날 날이 없으셨고요. 매일 눈을 뜨면 무서운 할머니의 낯빛부터 살피고 눈빛부터 읽어야 하셨지요. 할머니는 항상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잘못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셨지요. 생떼 같던 훌륭한 아들 셋을 전쟁으로 졸지에 다 잃어버린 할머니의 상실감을 풀 만만한 대상이 아마도 어머니였나 봅니다.

“영치(오빠) 에미는 워낙 꾀가 많고 영리해서 다른 애들이 못 당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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