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오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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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오일장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07.1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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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시끌벅적한 옥천 오일장
5일마다 열리는 옥천 오일장은 옥천읍 금구리 종합상가부터 옥천재래시장, 옥천마을금고, 옥천농협 인근 상가와 가화교, 금구천 둑방 길에서 좌판을 벌이며 활기를 띤다. 옥천 5일장 장세 옥천 읍내는 물론 동이, 이원, 군서, 군북, 안내, 안남 인근 주민들이 생산한 채소와 과일, 고추, 마늘, 곡물 등을 팔고 사며 문전성시를 이룬다.

조선 후기에 발행된 옥천과 청산읍지에 옥천 장날(場市)은 구읍의 옥천읍시(邑市)와 현 이원면 현리인 이내면 이원시(伊院市), 양산시(현 영동 양산), 안남면 연주리의 주암시(舟岩市), 청산시(靑山市)가 있다고 기록했다.

1905년 경부선 옥천역과 우체국이 생기고 금구, 삼양리 일대가 1919년 군청이 구읍서 읍내 삼양리로 이전하니 각종 공공기관이 들어섰다. 일본인에 의해 신시가지인 옥천역에서 군청에 이르는 앞 신작로가 개발된다. 현재 정거정이라 불리는 옥천읍내는 1930~40년대에 마암리에 큰 옥천재건조장(담배원료공장)과 청산 월명광산, 청성 광산의 일본 기술자와 등이 대거 이주하며 옥천 거주 일본인이 500여 명으로 증가하며 옥천의 각종 상권을 장악한 일본인들에 의해 번화해졌다.

△옥천장날 구읍서 1937년 금구리 이전
옥천 5일장은 원래 옥천 구읍 죽향리에서 1937년에 옥천읍 금구리 종합상가 일대로 이전했다. 해방 후 삼양리 농협 옥천군지부부터 옥천농협에 이르는 뒷신작로가 개설되며 버스와 차량이 다니는 주도로가 되면서 옥천장터 함석 장옥이 건축되며 형성됐다.

1978년 옥천읍 소도읍 가꾸기 사업으로 읍내 상업지역 건물이 현대화되며 오늘날 옥천읍내 중심가인 금구, 신기, 삼양리 일대가 현대식 콘크리트식 건물로 탈바꿈되었다.

금구리 종합상가 부근 뒤편으로 싸전과 채소전, 난전 등 먼저 이전하였다. 몇 년 후에 옥천 우시장은 옥천재래시장 인근 금구천과 귀일천이 합수되는 둑방 안쪽으로 이전하여 넓은 터에 각각 줄 지어선 말목에 소를 맨 쇠전이 섰고 한쪽에 돼지와 닭을 팔았다.

△옥천 우시장 月 2천두 매매, 전국 2위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옥천 우시장은 거래 규모가 매우 커서 한 달에 2,000두의 소가 매매되어 전국에서 2번째로 큰 우시장이었다.

1978년 옥천소도읍가꾸기 이전의 종합상가 일대는 싸전과 포목점이 있었고 그 뒤편과 옥천극장 앞에 옷과 각종 생필품을 파는 장옥과 난전이 있었다. 흰 광목을 둘러친 국수와 사발 띠기 막걸리 등을 파는 난전 장터와 구수한 침샘을 자극하는 장국밥집은 소장수들로 북적됐다.

1968년에는 옥천군 주민 인구수가 11만을 넘어서고 국제종합기계와 은성산업 등 공장들이 입주하며 20년 간 이원장, 청산장과 함께 옥천장은 최대 전성기를 누렸다.

△해방되고 다시 구읍, 오근호 교수 회상  
그리고 옥천 5일장마다 1960년대 규모는 좀 작지만, 구읍에서도 우시장이 하계리 지용문학관 맞은편 실개천 부근에서 섰다. 이에 대해 춘추민속관에 살았던 오근호 한양대 초대 공과대학원장은 “왜정 때 구읍 읍내에서 금구리 정거장으로 뺏겼다고, 해방되고서 구읍에서 몇 번 서다가 다시 정거장으로 갔어요. 구읍 오일장은 구읍네거리에서 섯밭탱이 저수지 가는 방향 공간에 있었고, 오른쪽에 주재소가 있어서 긴 칼 찬 순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구읍장터서 섯밭탱이 가는 우측 큰 공터가 옛 옥천 관아건물의 주춧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1960년대 옥천 장날이면 구읍 사거리 일대에도 생선과 제사상 물품 가게 등이 제법 장사가 잘되었다. 1937년 이전의 구읍 우시장은 금구리로 이전하기 전에는 죽향리 구군수 관사 부근 이라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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