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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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지 못하고
  • 박하현 시인·시집 감포 등대
  • 승인 2019.08.0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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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현 시인·시집 감포 등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알려진 대로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 단편의 제목들이다. 두 제목을 하나로 묶는다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가 되지 싶다. 작가는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휘하의 노동자인 농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의식을 깨우고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려는 노력으로 소설을 집필할 정도였다고 한다.

내용으로만 알던 작품을 다시 읽으며 우리나라 심훈의 ‘상록수’를 떠올리기도 하고 문학을 통한 그 같은 민족 개혁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내 것을 내어주며 사랑으로 살기! 단지 자신이 묻힐 만큼의 땅 소유!’가 두 소설의 주제이자 질문의 답이 될 것이다. 그래 보려고 지금까지 애썼던 것처럼, 남은 날들을 살아야지 다짐하면서 이야기 하나 전한다.

주택가지만 집 앞 공터에 텃밭을 일굴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는 일인. 말이 행운이지 그곳은 쓰레기로 언덕을 이룬 상태였다. 이웃들과 함께 우선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사서 수년간 묻혀 있던 건축 쓰레기며 깡통 등을 치웠다. 그대로 방치하면 여전한 쓰레기장이 될 게 뻔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깨끗한 상태를 만들어야 했다. 십시일반 거름과 모종을 샀고 고추, 오이, 가지, 호박 몇 그루씩을 심어 나눠 먹는 즐거움을 누렸다.

한여름 물주기와 비 온 후의 풀 뽑기는 바로 앞집 부부 담당이었다. 풀밭도 아닌, 채마밭도 아닌, 꽃밭을 만드는 게 최종 목표여서 집안에서 키우던 꽃도, 씨앗도 서로 앞다투어 뿌리고 가꿔가던 중이었다. 땅을 사려 한다는 젊은 부부를 만난 적 있고 그들에게 양해도 구해 놓은 터였는데 4월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누군가 땅을 일구고 경작 금지 팻말을 세워 놓은 거였다. 올봄에는 양귀비꽃과 수레국화꽃이 하늘거리겠거니, 산책길의 사람들이 잠깐 걸음을 멈추기도 하겠거니, 씨앗이 씨앗을 퍼뜨려 내년에는 더 풍성한 꽃밭이 되겠거니, 즐거운 상상으로 한 뼘씩 자란 어린싹들을 둘러보곤 했던 터였다. 하지만 피어오르던 그 기대는 무참한 삽질에 짓이겨지고 말았다.

땅 주인의 엄마라는 검은 썬글래스 그녀는 ‘풀인지 꽃인지 알 게 뭐냐’며 ‘몇억 주고 산 땅인 줄 아느냐’ 식으로 큰소리를 냈고, 참다못한 일인은 ‘그깟 몇억보다 꽃이 더 중요하다’며 맞대응했다. 결코 성숙하지 못하고 온유하지는 더더욱 못한 모습이었다.

결론적으로 일인은 남편으로부터 잔뜩 미운 소리만 들었고 이웃들을 놀라게 했을 뿐 꽃밭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대신 고구마, 옥수수, 토마토, 고추, 열무, 상추 등 온갖 야채들이 자라는 농장이 생겼으니 됐다며 애써 마음을 달래곤 했다. 금계국 한 포기는 남아 한 아름 샹들리에로 핀 것이 내내 위안이 되었다. 한 번 다녀갈 때마다 뽑힌 모종 속에서도 불사조처럼 일어나는 꽃모종이 있어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그 손아귀에서 잘 살아남았구나, 장하다, 어서 피어나렴,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길옆 가장자리여서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모양 같았다.

아니 오늘 본 것은 딴판이었다. 곧 피어날 것 같던 백일홍과 서광 꽃봉오리들이 풀과 함께 누렇게 타들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그저께 약 치는 모습을 보며 벌레가 있는 모양이다 여겼는데 실상은 제초제를 뿌렸던 것, 툭 가슴이 내려앉더니 이내 싸르르 아파왔다. 차를 타고 와 밤늦도록 풀을 뽑아야 했던 그들에게 필요한 작업이었을지 모른다고 하기엔 도저히 용납 못하겠는 일인, 그이는 편협한 자신과 끙끙 씨름해야 했다.

한 번 뿌리면 몇 년 동안 땅이 죽는다던 할아버지의 말씀이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저 많은 야채들을 두고 더 심을 것이 있었을까, 풀 하나 없는 텃밭을 만들고 싶었던 걸까, 이젠 땅이 죽든 살든 알 게 뭐냐며 말하려나. 내 알 바 아니라 하는 건 도저히 못 하겠다는 일인... 그래도 알 바 아니다, 무서운 저들에게 그래야 한다고 얼마나 단단히 들었던가. 그렇지만 그래도...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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