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뜬 장님이 글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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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뜬 장님이 글을 읽기 시작했다
  • 도복희기자
  • 승인 2019.08.1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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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어머니학교 한글교사 우을순

우을순(옥천군여성단체협의회 회장·62) 교사는 안남 어머니학교에서 14년 동안 함께 해왔다. 금요일마다 어르신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온 것.

자신의 이름도 쓸 수 없는 분들에게 배움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였다. 한글공부는 한쪽 귀로 들으면 다른 한쪽 귀로 새나간다는 어르신들의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콩나물시루에 물주기’에 대해 말하곤 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물이 다 새나가지만 콩나물은 자란다. 마찬가지로 다 새어나가도 어르신들의 한글 실력은 지금도 쑥쑥 자라고 있다며 용기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붓글씨를 오랫동안 써 온 우 교사는 어르신들에게 ‘가화만사성’이란 한자를 일년이 넘도록 쓰게 했다.

오랜 동안 필사 연습을 통해 붓글씨 연습을 한지 일년 후 한분 한분의 작품을 액자로 만들어 드렸다. 어느 날 ‘집 가’자를 봤다며 아는 만큼 보이더라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14년 간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았다고 기억했다. 어르신들은 한글을 몰랐지만 생활 속에서 터득한 유머와 지혜는 놀라웠다며 감탄했다.

우 교사는 발표력을 기르기 위해 어르신들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한을 끌어내고 눈높이에 맞춰 수업을 하고 싶었다고. 실제로 어머니학교에서 수업 중에 어르신들이 한 말을 노트에 가득 적어 놓았다.

그동안 수많은 분들이 어머니학교 교사로 왔다가 떠나갔지만 그녀는 떠날 수가 없었다. 꽤 괜찮은 직장에 제의를 받았어도 금요일마다 빠지면서 나갈 수 있는 일터는 없었다. 직장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 뜬 장님 같은 눈을 뜨게 우리를 가르치려고 시골에 들어왔다’며 좋아하는 어르신들이 자신의 일보다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안남으로 오는 버스를 탈 수 있게 되었고, 농협에 가서 내 이름을 직접 쓸 수 있게 되었다”며 환하게 웃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우 교사에게도 큰 행복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후 처음에는 붓글씨를 쓰는 등 취미생활만 해 온 우 교사는 우연히 안남어머니학교에 대체교사로 몇 달 간만 하려고 갔다가 14년 간 지속해 지금껏 오게 된 것.

봉사는 중독이라고 말하는 우을순 교사는 “어떤 일이든지 미치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며 “타인에게 될 수 있는 한 상처 주지 않고 어디 가든지 내가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임하고 있다”고 소신을 밝혔다.

지난해까지 수업을 하고 옥천군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맡으며 올해 잠시 수업을 중단하고 있는 그녀는 회장직을 마치는 대로 다시 어머니학교 교사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한글을 모르는 어머니들에게 글이 보이는 세상으로 안내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안남 들판의 푸른 바람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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