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그 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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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그 끝이 있다
  • 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 승인 2019.09.1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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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만물이 살아서 움트는 이 봄철에 각자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면 한다. 그 귀 기울임에서 새로운 삶을 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1997년 법정은 네팔과 인도 히말라야의 가난한 산촌을 여행하고 있었다. 법정은 그들의 삶을 보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와는 비교할 바 없이 열악한 수준이지만 도시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그들의 따뜻한 인정과 맑은 눈빛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삶의 가치 척도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를 두고두고 생각하게 했다.”
법정은 귀국하기 위해 뉴델리에 들렀을 때 숙소의 텔레비전 화면에서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거덜 난 나라 살림을 국제구제금융에 호소하는 뉴스를 보았다. 그날의 상황을 법정은 솔직하게 피력했다. “나는 온몸에 열이 나고 몸살 기운이 번졌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자탄하게 되었다.” 법정은 그동안 자신이 누누이 경고해왔던 말들을 떠 올렸다. 금융위기가 찾아올 것이란 걸 예감했던 법정은 1997년 초부터 경고의 글을 몇 차례 쓴 적이 있었다. 어쩌면 물신에 현혹되어 그저 성장만을 바라보는 현대인에 대한 그의 질타 모두가 그 경고에 해당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법정은 그동안 물신에 현혹되어 빗나간 우리들의 인성이 오늘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먼저 삶의 가치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일이야말로 사람의 도리이고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다.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면 추상적인 신이나 부처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을 통해서 그리고 그 보살핌 안에서 이루어진다며 절망하지 말 것을, 어려울 때 이웃을 돌아볼 것을 말했다. 아울러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은 되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지려는 그 과정이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그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쇠붙이인 비행기가 공중을 날아가는 것은 거기 공기의 반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공기의 저항이 없으면 비행기는 공중에서 뜰 수가 없다. 새들이 공중을 나는 것도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것도 이런 현상이다. 무사 안일한 태평세월보다는 차라리 난세야말로 그 저항을 통해서 살맛 나는 세상이란 말일 것이다. 화두처럼 법정은 말했다. 저마다 자기 자신을 구제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구제받을 수 있지 밖에서 어떤 손길이 뻗쳐서 우리를 구제해 주는 것이 아니다. 마른 가지에도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는 것은 생명의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생명의 그 신비와 아름다움은 우리들 안에도 깃들어 있다.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만물이 살아 움트는 이 봄철에 각기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면 한다. 그 귀 기울임에서 새로운 삶을 열었으면 좋겠다. 덧붙어 그는 강조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그 끝이 있다. 오늘의 어려움을 재충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다. 우리는 IMF를 슬기롭게 결혼반지. 아이들의 돌 반지. 돼지 저금통 등 국민의 결집으로 해결했으며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이고 낡은 문이 닫히면 새문이 열리게 마련이다. 얼어붙은 대지에 봄이 움트듯이 좌절하지 말고 희망의 씨를 뿌리자. 1888-1966 10월 15일 새벽 3시 예불을 올릴 즈음에 효봉 스님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 오늘 갈란다. 오전 10시 효봉 스님이 굴리던 호두알 소리가 문득 멈추었다. 이찬형 효봉 스님은 일제 강점기 때 최초의 한국 판사였다. 법복을 입은 지 10년 1923년 평양복심법원 현재 고등법원 판사로 있던 그는 3일간의 식음을 전폐하고 고뇌했다.

처음 내린 사형선고 때문이었다. 이민족의 압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인 동포 사상범을 다뤄야 하는 그에게 법의는 출세와 영광의 정상이 아니었다. 안심을 옥죄는 번뇌 그 자체였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다. 이찬형은 가족과 판사직을 버리고 홀연히 떠났다. 3년간 엿판 하나 메고 팔도강산을 방랑하는 고행에 나섰다. 그리고 1925년 금강산 유점사를 찾아갔다. 여기서 신계사 보운암의 석두화상을 찾으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찬형은 그길로 석두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그는 ‘절구통수좌’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다. 엉덩이가 물러터져 깔고 앉은 방석이 붙을 정도로 수행에 정진해 생긴 별칭이었다. 효봉은 1937년 금강산과 작별을 고한다. 그의 발길이 머문 곳은 전남 순천 조계산의 송광사였다. 처음 찾아간 절인데도 아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법정은 말했다. 우리나라의. 특히 봄은 노는 땅이 없어야 한다. 농업을 본업으로 하는 농민은 말할 여지가 없으나 일반 공무원들도 봄의 계절에는 공휴일을 통해 자원봉사에 임하는 습관으로 노는 땅이 없도록 솔선수범의 국민성이 있어야 할 것 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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