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울음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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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울음터란다
  • 박하현 시인·시집 저녁의 대화
  • 승인 2019.10.24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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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현 시인·시집 저녁의 대화

사계절 파도는 때로 거칠게 때로는 자잘하게 다가왔다 잦아들기를 반복한다. 개인의 삶도, 우리 사회도 파도 같은 역사임을 잊지 않으려 애써 보는데도 몇 가지 순적하지 못한 일 앞에서 의연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몸이 먼저 알아 취약한 부분에 탈이 생기곤 한다. 위 무력증으로 한동안 고생을 했는데 이번엔 다른 부위가 탈이다. 건치라 자부하던 잇몸에 문제가 생기더니 결국 잘라내는 수술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며칠 약을 먹으면 가라앉았다고 기억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한 달이 되어가도록 불편하고 음식을 씹기는커녕 맛이 느껴지지 않더니 저절로 살이 빠졌다. 새삼 우리 몸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자신과 사회가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눈을 번쩍 치켜뜨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날카로운 눈을 잠재울 수 있는 무엇을 찾다가 울음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거기 답이 있었다.

정조 시대 청나라 건륭황제의 생신 축하 외교사절단으로 중국에 가게 된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도강록’ 편에서 일행은 어떤 절경 앞에 서게 된다. 그런데 별안간 경탄하는 대신 통곡하기 좋은 장소라 말해 의아함을 자아내게 한다. 그의 설명은 인간의 감정을 대표하는 칠정, 희노애락애오욕 모든 부분에 울음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기쁨이, 분노가, 즐거움이, 사랑이, 미움이, 욕심이 극에 달하면 눈물이 날 만하고, 통곡은 그처럼 막히고 억눌린 마음을 풀어버리는데 빠른 방법이라 말하고 있다. 곰곰 생각해보면 이치에 맞는 말이다. 마음과 몸이 같지 않고, 이성과 감정이 같지 않은 이질감으로 뭉친 것이 우리 몸일지 모른다. 요즘 국정의 진영 논리와 국민이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을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언젠가부터 ‘힘들다’는 말, ‘아프다’는 말, 거기다 눈물을 보이는 일은 창피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세상이 되었다. 일찍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울면 안 돼’,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노래하게 했고, 사나이라면 나아가 어른이라면 더더욱 울음은 금기시되어 부모상 장례식장에서조차 눈물은 보기 어렵다. 얼마 전 청소년들의 수필을 읽으면서 그들마저도 혼자만의 장소와 시간을 찾아 운다는 것을 알았다. 한참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는 시기에 울음의 본능마저 억압당해야 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본능은 이성의 하류 개념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 해소해야 하는 개념이다. 박지원의 글대로 저들의 막히고 억눌린 마음을 풀게 해야 한다.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면서, 혼돈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른을 존경할 수 없는 괴리감 속에서 청소년들은 분명 힘들고 아프다. 우는 것 하나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어른인 것 같아 눈물이 날 지경이다.

과거 우리나라와 일본 상황과 닮은 폴란드와 독일 관계에 대해 짧은 강의를 들은 적 있다. 독일은 사과했고 보상했으며, 폴란드는 자국 내 독일인 거주 지역을 역사문화로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 청소년들은 자국의 어른들이 행했던 부끄러운 현장을 둘러보며 마음에 새긴다는 것도 함께. 우리 다음 세대는 지금의 양국 상황을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을까. 이 갈등은 언제 정리가 되어 청소년 교류의 길이 자유로워질까. 어른이 되어 저들 사이를 막는 방해꾼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미안하고 부끄럽다. 이 모든 마음을 담아 통곡하고 싶다. 울음은 모든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냉기와 긴장을 녹이며 말을 대신하는 위로와 공감의 표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딘가 아프고 무너진 탓에 이 사회도 개인도 회복이 필요하고 치유가 급하다.

누구 하나 힘들지 않은 이가 없는데 부패를 막고 어둠을 비추는 소금과 빛은 어디에서 올까. 잇몸 회복을 위해 날마다 짠 소금물을 머금고 있곤 한다. 눈물의 짠 맛과 닮은꼴인 소금물은 상처 난 잇몸을 조여 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 모두가 부둥켜안고 울던 짠 맛 나는 날이 있었다. 광복이 그랬고, 이산가족의 만남이 그랬고, 월드컵 축구가 그랬다. 그러니 모든 사회 통념들을 박차고 울어야 하는 것이고 그 하나 된 모습이야말로 건강하고 평화로운 세계라 여겨진다. 우리 청소년들이 저들의 울음에 대해 찌질이 라거나 바보라 불러질 것에 대해 겁먹지 말았으면 좋겠다. 통곡 울음으로 해맑아져서 풋풋하고 싱그런 미소를 볼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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