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기 공출
상태바
큰애기 공출
  • 김외식 옥천군의회 의장
  • 승인 2019.10.24 16: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외식 옥천군의회 의장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역사를 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오백 년의 유구한 역사까지는 몰라도 가까운 현대사만이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나라가 힘이 없어 주권을 빼앗기고 짓밟히면 백성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콜라보들이다. 우리가 힘이 없어 주권을 빼앗기었으니 저들과 협조하여 살아야된다는 부류 또 한 부류는 힘을 모아 적을 물리쳐야 한다며 끝까지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지하조직이다. 나머지 대다수 백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허기진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대다수 민초들이다.

침략자들은 이것을 잘 알고 콜라보들을 앞세워 뒤에서 당근으로 이들을 조정 다수의 관망자들은 같은 방법을 동원 자신들의 침략 목표와 뜻을 달성하는데 이용한다. 또한 이들을 이용하고 조정해 저항세력 등을 제거하고 묶어두면서 침략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를 36년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민비시해와 고종의 미심쩍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을사늑약 일제의 음흉한 행동을 보면 50년이 넘는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우리 조상들이 겪었을 고통과 치욕을 생각해 보라. 같이 숨을 쉬고 이웃에 사는 자들이며 백성에 생사를 책임져야 할 위정자들이 악덕 친일파였으니 우리 지역에도 대표적인 집이 있다.

필자가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씀은 옮기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언니가 16세 때 큰애기 공출에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외할머니께서 보도듣도 못한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는데 가서 보니 앉은뱅이였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위안부라는 말을 몰라 ‘큰애기공출’이라고 하시는데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며 자주 눈물을 보이신다.

또한 공무원이란 용어의 이해 부족으로 면서기로 말씀하시는데 이웃 동네 면서기에 이름을 말하면서 가마니 공출이 저조하다며 집으로 찾아와 큰소리를 쳐 볏짚이 없다고 하자 지붕을 베껴 치면 될 것 아니냐며 느 외할아버지의 귀싸대기를 이리 때리고 저리 때려가며 훗날 길가에서 그분을 저와 함께 만나면 저 인간이 그랬다며 치를 떠는 모습과 분통을 터트리는 어머니에게서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곤 한다.

일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시가전에 쓰기 위하여 가마니가 필요했던 것이다. 빙산의 일각인 이런 일을 자행해 놓고 저들은 지금도 사과는커녕 할 말이 많다.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사지로 내몬 일등공신은 을사늑약 오적 이완용이다. 그는 과거시험에서 문과로 급제하여 주요 요직을 거치고 이토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고종에게 국난의 책임을 씌워 양위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등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후손들은 지금도 국내외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조상의 땅을 찾는다며 소송을 통하여 승소한 후 외국으로 출국하는 배신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친일사전 명부에는 악덕 악질 친일파들이 천여 명이 넘는다. 그중에서 노덕술과 장택상을 빼놓을 수 없다.

노덕술은 경남 울산 출신으로 군에서는 헌병대장 경찰로 자리를 옮겨 종로 경찰서 수사과장 중 식민지하에서 권력 기관의 장을 하면서 갖은 만행을 저지른 용서 받지 못할 친일 경찰이었다.

그가 저지른 악행 중 독립운동가이며 의혈단 단장인 김원봉 선생을 장택상의 지시로 연행하면서 용변을 보는 김원봉을 수갑을 채우고 머리채를 잡고 끌고 와 하의가 발목에 걸린 채로 장택상 앞에 세우고 공산주의자라며 따귀를 좌우로 갈겨 빨갱이를 잡는 경찰로 변신한 천인이 공노할 두고두고 용서받지 못한 민족의 반역자다.

이 모습을 면전에서 목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어허 누가 잘 모셔 오라고 했지 이리 대접하라고 했나 하며 회심의 미소를 띠며 조롱했으니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들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니 집으로 돌아가 삼일 밤낮을 통곡하다 남북협상대표로 김구 선생과 함께 평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장택상은 장승원의 아들로 대통령 빼고는 정부 중요 요직을 다 지낸 친일 인물이다. 장승원은 고종 말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격인 왕산 허위 선생님을 찾아가 경상북도 제찰사 자리를 주면 지금의 화폐 가치로 오십억 원을 제안, 도지사 자리를 매관매직했다.

이때 왕산 허위 선생은 그 돈을 지금 주면 백성에 고혈을 짤 터이니 지금 주지 말고 후일 독립운동가들이 어려워 찾아가거든 그때 주게 하며 증서 한 장을 받고 고종에 허락을 받은 인물이다. 수년이 흐른 후 그 증서를 어려운 독립운동가들에게 건넨다.

장승원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증서를 내놓으니 ‘암, 그런 사실이 있지 여부가 있나 주고말고.’ 하며 극진한 대접을 해 안심시키고는 일본경찰에 밀고를 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4명은 재판 절차도 없이 도경찰서 뒷마당에서 총살되는 참극의 원흉 장승원 아들이 바로 장택상이다.

이러한 장승원의 아들로 이승만 정권에서 악명 높은 친일경찰로 칠곡에서 대구를 가려면 이 두 부자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대를 이은 친일파로 현대사회 질곡에서 청산은 못했을망정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프랑스는 2차 대전 당시 침략군 독일로부터 점령 3년 후 해방되었다. 검거자 삼십만 명 이중 사형선고를 받은 자가 일만 팔천 명, 실제 집행이 된 자가 팔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도 집행 중이다.

아시아 국가들 중 중국, 인도,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심지어 북한도 친일파를 청산했다. 유독 우리만 지금까지도 이 문제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다. 청산은 못 할망정 잊어서는 안 된다. 잊으면 반복되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