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동양에도 없읍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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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동양에도 없읍데다”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11.1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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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쇼형 정지용이 무용가 조택원에게 쓴 답장 -
김묘순 문학평론가

11월 초, ‘인동초’를 보았다. 안내면 순두부집 앞에 핀 이 꽃의 향기는 대단히 향그럽다. 정지용도 「忍冬茶」라는 시를 쓰고 전직 대한민국 대통령도 인동초를 가장 좋아하였다 한다. 그만큼 인동초가 의미하는 바가 크리라는 생각이다.

혹자는 『문장』에 이어 『백록담』의 산문시에 이르러 정지용의 모더니즘은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한다. 『백록담』의 산문시는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에 걸쳐 왕성하게 제작된 일본의 산문시와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화자는 검은 운명의 파도가 나를 덮치려 하는데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하는 “불안감”에 차 있었다. 즉 시인이 동양적 문인취미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동양회귀”로 향하게 되었다. 이 중 “서양문명에 대한 불신감”(사나다 히로코,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역락, 2002, 215면)이 있었다. 그러나 1928년 7월 22일 세례를 받은 이후 가톨릭 신앙을 유지한 정지용은 서양문화에 대해 근본적인 불신감을 느낄 만한 결정적 계기가 없었다고 추측된다.

다카다 미즈호는 ‘일본회귀’를 ‘메이지형’과 ‘다이쇼형’으로 나누었다. 하쿠슈는 아시아를 서양제국에서 해방한다는 대동아전쟁의 이념을 믿고 민족의식과 결부시켜 고대일본으로 회귀를 촉구한다. 이때 하쿠슈는 7·5조의 문어체와 고대나 중세의 어휘를 사용한다. 이렇게 望鄕의 마음을 고어로 표현하고 침략전쟁을 일본고대신화에 비겨서 장중한 가락으로 노래하는 하쿠슈를 사람들은 ‘국민시인’이라 불렀다. 돌아가려고 하면 언제든지 자연스레 마음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外發的 개화 속에 자라서 시단에 등장한 자의 일본 회귀가 대체로 자연스러운 경과였던 것(『日本近代詩史』, 早稻大學出版部 , 1980, 202-203면)이다.

하쿠슈의 일본회귀는 메이지형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사쿠타로는 ‘문어체는 극심한 노여움이나 절박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동양적 문인취미에 안주할 자리를 찾은 것은 아닌’ 다이쇼형의 일본회귀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사나다 히로코, 앞의 책, 216-217면). 하쿠슈에게 일본은 상처 입은 자아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그리운 고향(돌아갈 고향이 없음을 알면서 이루어지는 역설적인 것으로 인식된다)이었지만 사쿠타로에겐 虛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 정지용은 젊은 날에 동경의 대상이었던 하쿠슈의 메이지형 회귀를 어떻게 보았는가?  이에 대해 정지용이 문헌적으로 남긴 말은 찾지 못하였다. 다만 정지용의 ‘동양 회귀’는 사쿠타로 유형에 가깝다. 정지용이 『백록담』시절을 포함해 한시적 세계나 동양적 고담의 정서에 잠시 잠겼다하더라도 그가 돌아갈 고향은 아니었다. 하쿠슈 등 일본 메이지형 시인들은 고어를 쓰고 7·5조의 운율에 회귀하였다. 그러나 정지용은 돌아갈 운율이 없었다. 그리하여 『문장』 시절에 산문시 형식에 유독 집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조나 고대가요의 운율은 있었다.

그러나 박용철과의 대담에서 “東京文壇에는 신체시의 시기가 있고 그 다음에 자유시가 생겨서 나중에는 민중시의 무엇이니 하는 일종의 혼돈의 시대가 나타났지만 우리는 신체시의 시기가 없었다. 고대가요나 시조는 우리의 전통이 되지 못하였지요”(「시문학에 대하야」, 1938). 이는 정지용이 한국근대시를 전통과 일단 단절된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용철의 “시가 앞으로 동양적 취미를 취할 것인가? 서양취미를 취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그렇게 깊이 생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정지용은 대답한다. 그리고 무용가 조택원이 파리로 유학 가서 보낸 편지에 “시는 동양에 있습데다”라고 하자 “그럴까 하고 하루는 비를 맞아가며 양철집 초가집 벽돌집 建陽舍집 골목으로 한나절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답장을 써 부쳤다.……시는 동양에도 없읍데다.”(「참신한 동양인」, 1938)라고 정지용은 답장을 쓴다. 그는 고향이 이미 상실되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래서 정지용은 시는 새로 시작하여야 한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뇌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어나 방언 그리고 의도적인 시각적 부호(졸고, 「정지용의 「슬픈 印像畵」에 대한 小考」에서는 ‘언어외적 기호’로 명명)를 사용하여 시적 어휘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어휘들은 정지용의 섬세한 감각과 마주쳐 오늘의 한국현대시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지용은 기타하라 하쿠슈를 향해 “하쿠슈씨에게 편지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지만(중략) 편지는 삼가하겠으므로, 이러한 마음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과묵과 먼 그리움이라는 동양풍으로 저 흠모하겠습니다.”(『근대풍경』2권 3호, 1927. 3, 90면)라는 「편지 하나」를 편집부 0씨에게 남긴다. 

어디에도 없을 한국현대시를 향한 사랑의 굴레, “山中에 冊曆도 없이 / 三冬이 하이얗다.”(『문장』23호, 1941, 119면. 『백록담』에 재수록)라는 「忍冬茶」를 다시 생각한다. 三冬이 하이얗게 동양풍의 과묵과 먼 그리움이 정지용을 향한다. 가을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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