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nk you, H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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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 you, Hesse
  • 김명순 약사
  • 승인 2019.12.1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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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약사

12월의 바람은 색깔마저 다르다. 세상의 빛깔들을 모두 흡입해버리는지 스산한 바람이 스치는 곳마다 마법처럼 색들이 가난해지고 있다. 돌아가야 할 때를 알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분연히 이별을 고하는 초목들이, 여백이 풍성한 수묵화 같은 얼굴로 말을 건넨다. 이제 당신의 한 해도 정리해야 할 시간이라고.

사람은 부정적인 것에 더 영향을 받는 ‘부정편향’ 심리를 갖고 있어, 지난 시간을 반추하다보면 회한―발전욕구의 내재를 원인으로 해석하고 싶은―을 가장 무겁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 회한 속에 침몰되면 결국 ‘나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같은 근원적인 물음에 닿게 된다. 이러한 질문에 명료한 답을 하긴 참 어려운데, 헤르만 헤세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데미안』)이라고 진지하게 답한다. 구르는 돌에도 존재 의미가 있듯 인생은 결국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므로, 하나뿐인 자신만의 삶을 유의미하다고 인정하길 조언하는 것이다, 헤세는 30대 후반의 작품 『크눌프』 주인공처럼 인생의 의미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다가 40대 초반 『데미안』을 집필할 무렵, 그 답을 얻은 듯하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명작을 읽으면서 데카르트의 말―“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자주 실감하지만, 특히 헤세의 글들은 평범하면서도 영혼을 위로하는 양 깊은 공명이 느껴진다. 진정성을 추구했던―『싯다르타』 집필 중에 체험 없인 쓸 수 없다며 중단했다 재집필한 일과 750페이지 분량의 『유리알 유희』를 무려 11년 동안이나 집필한 일 등으로 엿볼 수 있는― 작가정신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일까? 인류의 영원한 정신적 스승이라고 일컬어지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헤세가 정신적으로 방황했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이 가질 법한 의문들과 자연에 대해 천착하며 쓴 작품들의 바탕에는, 자연을 배제한 서양 철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외가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동양의 불교와 노장사상이 깔려있다. 작가는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을 형상화 한 『싯다르타』와 스스로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명명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자연이 스승이라는 소신과 동서양이 조화된 세계를 향한 꿈을 집중적으로 녹여냈다. 

한편 1946년 노벨상을 수상한 『유리알 유희』는 ‘정신문화사적인 미래소설’로, 평화주의자였던 그가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식했던 서양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고자 쓴 걸작이다. 이 작품은 철학·신학·동서양 음악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며, 평생 선과 악, 삶과 죽음 등 양 극단의 조화와 균형 방법을 탐구한 작가의 문학인생 여정을 온전히 담아냈다. 특히 서문에, 놀랍게도 현대 지식정보사회와 멀티미디어 문제를 예견한 부분―“그날그날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급하게 성의 없이 쓴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이 모든 정보를 (…) 기사화하는 일은 (…) 무책임하게 대량 생산되는 상품” 등의 문장―들과 가상현실·정신건강 등에 대해 고찰한 부분들은, 미래소설이라는 별칭을 무색하지 않게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서문이 철학논문과 흡사하기 때문에 완독을 포기할 수 있으므로, 서문을 맨 나중에 읽는 방법도 권할 만하다.

자연과 평화를 사랑한 헤세는 전쟁 문제로 조국 독일을 비판했고, 스위스로 망명 후 자연에 묻혀 그림·음악·문학과 더불어 말년을 보냈다. 그가 남긴 소박한 삽화와 수채화도 작가를 닮은 소설처럼 꾸밈이 없다. 이렇듯 담백하게 삶을 마무리했던 헤세의 서정적이고 심오한 소설들을―뭇사람들은 소설을 폄하하지만― 통해 배운 인생의 의미가, 사는데 바쁜 소소한 삶도 나름대로 가치 있다고 위로한다. 또한 내년에도, 비슷하지만 새로울 자신의 길을 찾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자긍심을 갖고 한 걸음씩 나아가라고 권유한다. “모든 시작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어/우리를 지켜 주고 살아가도록 도와”(『유리알 유희』)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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