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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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살아야 한다
  • 권예자 수필가
  • 승인 2019.12.2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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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예자 수필가

그날, 어머니는 하늘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에 옥비녀를 꽂으셨다. 내게도 명절에나 입던 한복을 입혀주셨다. 박꽃같이 하얀 얼굴로 미소 지으며 일곱 살 어린 내 손을 꼭 잡고, 집에서 한참을 걸어야 하는 도립병원까지 가서 진찰을 받으셨다. 내가 어머니를 따라 병원에 가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도 들르셨다. 높다란 난간이 있는 한옥의 유치원 건물을 천천히 돌아보고 나서, 우리는 그네 앞까지 갔다. 유치원 마당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네를 탔고 어머니는 그네 아래서 대견하다는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매일같이 편찮으시던 어머니와 나들이를 나선 것이 기뻐서 나는 신나게 그네를 탔다.

하늘의 구름송이들이 내 발끝에 닿았다가는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기를 얼마나 하였던가. 어머니는 정지된 필름 속의 사진처럼 계속 웃으시며 그렇게 서 계셨다. 갑작스런 소나기가 퍼붓기 전까지는….

소나기,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그때처럼 줄기가 굵은 소나기를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내 그네를 멈추어 주려 하셨지만 하늘 높이 오르내리던 그네는 쉽게 멈추어지지 않았고, 당황한 나는 그만 땅으로 털썩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옷이 흠뻑 젖어서 유치원 처마 밑에 서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하얀 손수건을 짜고 또 짜서 내 얼굴과 옷을 닦아주고, 또 닦아주시며

“아가, 잘 자라라. 그리고 곱게 살아라. 곱게, 곱게 살아야 한다.”

몇 번이고 말씀하시며, 나를 꼭 껴안고 내 뺨에 당신의 얼굴을 비비며 우셨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다. 유방암이셨던 어머니는 당시 대전에서는 처음으로 도립병원에서 유방절개 수술을 받으셨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암은 재발하였고, 스물아홉 아름다운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그리고 잘라낸 유방만이 오래도록 알코올에 담겨 도립병원에 보존되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다가 금방 개는 소나기, 어머니는 그 마지막 나들이 때의 소나기처럼 짧으나 깊은 사랑을 주위에 남겨주고 떠나셨다. 언제나 가난한 동네 사람들을 챙기셨고,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친절하시어 ‘천상선녀’라는 예쁜 별명을 남기고 가셨다. 그 덕으로 나는 오래도록 주위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특히 손위 시누인 고모는 올케의 은덕을 갚아야 한다며, 엄마 없는 나를 잘 길러 주시고 내 아이들까지 돌보아 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25까지 겪으면서 우리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오는 길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힘들어 지쳐 삶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소나기 내리던 그날, 어머니가 남기신 눈물겨운 목소리가 나를 일으켜 세우곤 하였다. 죽음을 앞두신 어머니가 철모르는 딸에게 남긴 그 한마디를 지키기 위해 나는 곱게 살아야만 하였다. 또 천상선녀라는 어머니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곱게 살려고 노력했다.

나는 지금도 ‘우리유치원’ 앞을 지날 때라든지, 무더운 여름 날 한줄기 소나기가 내리면 50여 년 전의 그날처럼 그 비에 흠뻑 젖고는 한다. 흔들리는 유치원 그네와 어머니의 하늘빛 치마저고리와 눈물에 젖은 뺨의 감촉을 느끼며, 그 절절한 음성을 다시 듣는다.

“아가, 곱게 살아라. 곱게, 곱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은 안개속인 듯 희미하여 언제나 나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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