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그는 천재였다…시 ‘슬픈 인상화’에 드러난 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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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그는 천재였다…시 ‘슬픈 인상화’에 드러난 심상
  • 임요준기자
  • 승인 2020.01.02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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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4번의 개작 통해 뭘 말하고 싶었나

글 싣는 순서글 싣는 순서

Ⅰ. 4번의 개작 통해 뭘 말하고 싶었나

Ⅱ. 천재 정지용, 기호의 시각화 시도

Ⅲ. 감옥과 같은 식민지 국민의 설움

정지용. 한국현대시의 아버지. 옥천 출신. 시 ‘향수’의 작가. 시대적 이데올로기 희생자.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도 참 많습니다. 월북자에 낙인 찍혀 그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그의 출생년도 1902년조차 그의 자필 교회 입회지원서에는 1903년으로 기록돼 있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난제 속에 그의 천재성이 오롯이 드러난 시 한편이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13~16일까지 열린 제9회 일본 지용제에서 김묘순 문학평론가는 ‘정지용을 말한다 정지용의 슬픈 인상화에 대한 소고’의 논문발표를 통해 그의 천재성과 식민지 국민의 설움이라는 심상까지 들어다 보았습니다. 향수신문은 신년 특별기획으로 김 평론가의 논문의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하며 옥천인물 정지용의 또 다른 시 세계와 그가 남긴 한국 근·현대시에 끼친 업적을 살펴봅니다. 옥천인으로서 정지용 시인을 알아가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편집자 주

김묘순 문학평론가는 정지용의 시 ‘슬픈 인상화’에 대한 논문 연구의 배경을 설명하며 “정지용 시인은 천재였다”고 역설했다.

정지용 시인의 시 ‘슬픈 印像畵’. 일본어 판 원제는 ‘仁川港の或る追憶’(인천항의 어떤 추억)이다. 최초 일본어 시에서 조선어로 개작, 다시 일본어로, 마지막엔 다시 조선어로, 네 번의 걸쳐 개작, 발표됐다.

김묘순 평론가는 바로 이 개작과정에 눈독을 들였다. 개작의 의미와 시에 드러난 언어적, 언어외적 기호화에 깊은 관심을 둔 것이다.

김 평론가의 논문 서두를 빌리자면 “기존의 연구는 기호를 통한 시각화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그것의 이미지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정지용의 기호학적 접근은 이미지의 하위 개념으로 혹은 중간에 의한 上下의 구분으로 공간화하고 있다. 이는 이미지 연구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지엽으로 언급되고 있었다. 이러한 언급은 기호학적 접근 특히 그것의 시각화 작업의 특성에 맞춘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이 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와 그의 이번 논문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된 대목이다.

그러면서 “슬픈 印像畵의 서지학적 변이 과정과 문장부호나 표기법, 행과 연의 구분으로 표출되고 있는 정지용의 기호학적 시각화 의도와 효과 등에 접근했다”고 논문의 방향을 설명했다.
김 평론가에 따르면, 정지용은 일본 동지사대학 유학시절 ‘仁川港の或る追憶’과 ‘슬픈印像畵’, ‘悲しき印像畵’(슬픔의 인상화)를 발표한다. 仁川港の或る追憶은 정지용이 1925년 이 대학 예과학생지 4호에 발표한다. 당시 정지용은 옥천에서 강연을 하며 일본과 경성 그리고 그의 고향 옥천까지 활동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동시를 발표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이때 정지용은 기독교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그는 애초 동지사대학 신학부에 입학, 옥천 강의에서도 유석동을 초대하였고, 휘문고보에서 같이 활동했을 조구순을 초빙해 강의를 맡긴 것으로 보아 정지용의 당시 활약상의 범위가 넓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정지용은 그와 함께 동지사대학에서 수학한 고다마와 폭넓은 교류를 했다. 이듬해 정지용은 ‘學潮’(학조) 1호에 ‘슬픈印像畵’를 실었다. 또한 일본어로 ‘悲しき印像畵’를 1927년 ‘近代風景’(근대풍경) 2권 3호에 재수록 했다.  이후 1935년 정지용 시집에 ‘슬픈 印像畵’로 거듭 수록하게 된다. 이와 같이 현재까지 발견된 ‘仁川港の或る追憶’ - ‘슬픈印像畵’ - ‘悲しき印像畵’ - ‘슬픈 印像畵’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정지용은 이 시를 일본 유학시절, 거의 1년에 한 번씩 언어를 바꾸어가며 발표했다. 이러한 정지용의 ‘슬픈 印像畵’는 다소 특이한 개작과정, 다시 말해 조선어와 일본어라는 특이한 이중 언어의 개작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정지용은 1929년 6월 30일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 같은 해 9월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취임한다. 그곳에서 김도태, 이헌구, 이병기 등의 문학 동료를 만난다. 그리고 장남 구관과 부인을 솔거해서 서울 구로구 효자동으로 이사를 한다. 이때 정지용은 휘문고보 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시인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러한 정지용이 1930년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어울렸다. 이러한 인연으로 박용철이 관여하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정지용 시집’을 발행하게 된다. 다음은 ‘슬픈 印像畵’(1935년)의 전문이다.

수박냄새 품어 오는
첫녀름의 저녁 때………
먼 海岸 쪽
길옆나무에 느러 슨
電燈。 電燈。
헤염처 나온듯이 깜박어리고 빛나노나。

沉鬱하게 울려 오는
築港의 汽笛소리…… 汽笛소리……
異國情調로 퍼덕이는
稅關의 旗ㅅ발。 旗ㅅ발。

세멘트 깐 人道側으로 사폿사폿 옴기는
하이한  洋裝의 點景!

그는 흘러가는 失心한 風景이여니……
부즐없이 오랑쥬 껍질 씹는 시름……

아아 愛施利·黃!
그대는 上海로 가는구료………·

김 평론가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이 같은 정 시인의 네 번에 걸친 개작에 대해 “정 시인은 조선어와 일본어라는 이중언어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해석했다.

더불어 “정 시인은 언어적 환경이 자신이 의도하고자 한 핵심 이야기들을 다 표현하는데 제약과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라며 “그러기에 언어외적 기호를 사용했다. 이는 시(詩)마저도 눈으로 읽고자 시도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는 한국 시(詩)의 근대화 과정의 일종이며 현대시의 시발(始發)”이라고 평했다.

슬픈 인상화를 통해 본 천재 정지용의 기호의 시각화 시도는 다음 호에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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