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사 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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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 운해
  • 이수암 수필가
  • 승인 2020.01.0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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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암 수필가

용암사에서 내려다보는 운해가 아름답다고 입소문이 대단하다. 옛 화가들의 산수 진경이 생략되고 함축된 여백의 미에 가치를 둔다면 안개 속에 가리어진 운해는 절제되고 차단된 모습에 관심을 둔다고나 할까? 가리어진 세상 그것을 위하여 많은 사진작가들이 새벽을 다투어 고요한 산사의 적막을 깬다. 아름다운 순간의 포착을 위해 바치는 노력은 단순한 땀의 보상이 아닌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려는 한 예술혼이 느끼는 환희요 희열인 것 같다. 그 환희를 위하여 산등성이에 웅크리고 앉아 산 아래에 순간 순간 변화해 가는 안개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은 부처님 앞에 엎드려 절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우러러 기원하는 가녀린 여인의 간절한 소망을 보는 것 같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에서부터 안개 속에 모든 사물이 잠들어 버리고 산봉우리 몇 개만 섬처럼 떠 있는 절제되고 정화된 자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겠다고 새벽길을 오른다. 밤과 낮의 경계에 드리워진 하얀 장막 속에 익어가는 가을을 찍겠다고 새벽길을 오른다.

새벽 산길은 고요해서 좋고 풀잎에 맺힌 이슬이 발목을 적셔도 좋다. 밤이슬에 젖은 옷소매가 촉촉해서 여유롭고 칡넝쿨 풋내음이 코끝에 간지럽다.

언제부터인가 안개도 사람을 따라 산에 오르고 있다. 느릿느릿 사람의 등 뒤를 밀어 올리던 안개는 어느 사이에 파도처럼 출렁이며 산을 덮어 버리고 만다. 안개 덮인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치 구름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신선이라도 된 듯한 신비함도 느낀다.

단순하고 정화된 자연의 모습을 보는 마음은 아마도 번뇌의 사슬에서 벗어나 탈속한 성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속세와 차단된 탈속의 세상, 번거로움 속에서도 꿈꾸어 오던 이상의 세계가 여기에 있기에 억척스레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닐까?

안개속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눈을 감으면 고향길이 보이고 눈을 뜨면 뿌연 안개만 보인다. 해가 뜨면 나타날 안개속의 마을을 그려 본다. 양지바른 고샅길 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 가을볕을 즐기고 있는 노파들의 주름진 얼굴엔 누우런 벼이삭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고추잠자리 잡겠다고 맨발로 살금살금 다가가는 어린 아이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아이들이 없는 마을 이것이 서글픈 고향인가 보다.

굳이 내가 산에 오르는 이유가 있다면 오를수록 넓어지는 넉넉함 때문에 옹색한 가슴 터지는 듯한 시원함 그것 때문인 것 같다. 자질구레 속상하던 일들도 이때만은 숨 한번 크게 쉬고 뱉어버리는 시원함이 있기 때문이다.

구름이란다. 안개란다. 바다란다. 운무라거나 운해라고 하는 사치스런 이름이 필요한건 아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에 어떤 이름을 붙여도 부족함은 남는다. 어쩌면 말로 표현하는 그것 자체가 오만이요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 이름이야 구름이던 안개이던 간에 떠 있는 물방울임에 틀림없다. 물은 자정능력이 있어 언제나 맑고 순수해지기 위한 노력을 한다. 안개는 올망졸망한 세상 모습을 차단하고 세정하는 힘이 있다. 가리어져 있는 동안 맑고 깨끗한 그림으로 바꾸어 놓는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다. 순간이 지나면 순백의 세계로 가리어진 세상은 인화지에 현상되듯 동화속의 마을처럼 다시 피어오른다.

30여 년 전 새재 고개에서 새벽 출근길에 운 좋게도 운해를 만난 적이 있었다. 고개에 올라서자 강 건너 마을은 안개 속에 묻혀 있고 산봉우리 몇 개만 섬처럼 떠 있다.

“야! 안개 바다다.”라고 외쳤던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때에 동행했던 단발머리 여선생님은 이제 정년을 앞둔 노선생님이 되셨고, 같이 감격의 환호를 울리던 동료들은 모두 백발이 되었다. 기쁨도 즐거움도 늙어가는 모양이다. 대단한 기쁨도 그저 그렇고 소리쳐 외치고 싶은 즐거움도 시들하다. 감동의 표현이 미약하고 감격지수가 낮아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하얀 운해 위에 서서 백발 흩날리며 그때의 감동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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