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은 나의 인생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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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은 나의 인생을 바꿨다’
  • 우중화 시인
  • 승인 2020.02.0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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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화 시인

타인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현재 우리는 어렵지 않게 누군가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되고, 읽게 되고 수시로 찾아보게 된다. 그렇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과연 타인을 향한 내 시선과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터넷만 열면 무수히 많은 누군가의 기사들과 소식들이 펼쳐져 있고 SNS라는 공간속에서는 자신의 일상들을 공개하는 글들이 수시로 올라오곤 한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쓰고 보여주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의 시선은 진지하게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진지하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한동안 미뤄 두었던 독일영화 한 편을 보았다. 아주 오래된 2007년도에 개봉한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타인의 삶>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 1984년 동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국민들은 비밀경찰 <슈타지>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가 전혀 없던 시대이다. 통일이 되기 전 동독은 완전한 감시국가였고, 감시를 담당한 기관은 국가안전부였다. 그래서 동독 정부는 인민의 불만을 ‘감시’라는 억압적 체제로 크게 강화하여 누를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국가안전부 요원 <비슬러>는 동독의 사회체제가 옳다는 신념과 함께 국가안전부의 비밀경찰로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나라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어떤 회유나 협박이라도 주저하지 않는 냉혈인간처럼 살았던 자이다. 영화에서 그는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인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념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비슬러>는 극작가 <드라이먼>과 그의 사랑하는 연인 <크리스타>의 사생활을 24시간 감시하게 된다. 그는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 놓고 헤드폰을 낀 채 두 여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들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굳게 지켜왔던 자신의 신념들이 균열이 일어난 것을 느끼며 점차 얼어붙었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을 겪게 된다. 그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사회적인 이념 체계에 확신하고 살아왔던 <비슬러>는 격렬하게 신념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고 국가의 감시로부터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매일 헤드폰을 끼고 그들의 삶을 감시하며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비슬러>는 점점 그의 삶이 진실이 아니라고 느끼게 된다. 그의 표정이 처음에는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감시하는 시선이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삶을 이입하며 보게 되는 슬픈 표정으로 변화되어 간다. 영화의 정점은 그의 감시 대상인 <드라이먼>의 책상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을 가지고 나와 사랑의 사라짐에 대해 노래한 <마리 A.의 추억>을 읽는 대목이다. 거기서 주인공은 그의 지금까지의 신념이 철저하게 무너짐을 보여준다. 결국 <비슬러>는 국가안전부에서 쫓겨나게 되고, 통일 후에는 우체통에 광고지 넣는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영화 제목처럼 <타인의 삶>이 내 삶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 타인의 삶은 지금까지 내가 진실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나의 신념과 이념을 바꾸어 놓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성을 세우게 만들고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한 것이다. 내가 응시했던 타인의 삶이 결국 나를 바꾸어 놓게 된 것이다. <비슬러>는 영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은 나의 인생을 바꿨다’고.

우리가 바라보는 서로의 시선들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무형의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를 사물적 존재로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일상을 보면서 그저 관찰과 주시의 대상으로만 보게 되는 것은 아닌지. 또 타자와의 아름다운 소통의 관계보다는 더 은밀한 거짓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고독하게 만드는 매개체 밖에는 되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관계들이라면 타자와의 진정한 인격적 만남이나 결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저 서로의 자율의 삶과 자유의 사유들을 감시하고 방해하는 장애물 적 요소 밖에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보는 타인의 삶, 그 시선은 과연 무엇을 봐야 하고 나는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 것일까? 내게 보여지는 수많은 타인의 삶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내 삶 가운데 적용시켜 나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완벽한 삶이 아니다. 타인 또한 완벽한 삶이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서로가 애정의 눈으로 바라봐 줄 때 우리는 서로 변화하는 삶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준다. 그것은 타인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그 둘의 삶이 아름답게 마주칠 때 우리는 도덕성 내지 윤리의식을 일깨우는 고마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슬러>의 시선으로 바라본 진실한 타인의 일상들, 그것만이 나와 타인을 변화시키는 주요 요소로 전제되어야 한다고 봐야 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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