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청산군 한말의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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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청산군 한말의병(2)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0.02.2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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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 동학군을 진압한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 500년간 중국의 지배력을 빼앗고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고 노골적으로 조선 정부의 내정간섭을 좌지우지한다. 이에 따라 일본제국에 대한 민족적 반감이 높아 가던 중에 친일정권을 세우려는 일본공사 미우라가 1895년 10월 7일 밤에 경복궁에 침입, 민비를 살해한 후 시체를 불태우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게다가 1895년 11월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단발령을 강행함으로써 점차 높아가던 조선 백성의 분노는 의병전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의병이란 ‘국가가 위급할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충의군을 의미한다.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친일적인 각도의 관찰사와 수령들을 처벌하고 일본의 영향력 하에 있는 조선의 전국 행정조직을 마비시킴과 동시에 일본의 침략에 큰 타격을 주었다.

1895년 을미년, 1896년 병신, 1905년 을사, 1906년 병오년에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이 가장 활발한 의병의 본거지는 충북지방이었다. 1895년 민비가 시해로 촉발된 을미사변 직후 보은의 문석봉과 단발령 발표 직후 제천을 중심으로 한 유인석 의병이 봉기한 것은 전국 의병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5년 을사늑약 후 제천의 원용팔, 보은의 노병대 의병장이 봉기하였고 1907년 군대해산 후에 제천과 단양을 무대로 한 이강년 부대가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나 충북 내 타 지역과는 달리 옥천 지방의 항일 의병운동은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니었다.

그 원인은 1894년 동학혁명 때 옥천지방은 북접동학군의 근거지로 최시형 교주가 청산현 청서면(현재 청성면) 포전리와 청산현 청남면(현재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마을에 거주하며 전국 동학군을 지휘하던 동학전쟁의 주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동학군의 많은 지도자들이 일본군과 관군에게 체포, 처형됐기 때문에 나머지 잔여 동학군은 만주나 국내로 뿔뿔이 흩어져서 그 후유증으로 옥천군과 청산현 지역의 동학군과 유림 층에서 구한말 의병전쟁에 많이 참여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일본군과 관군의 동학군 색출 및 소멸 작전과 지방 민보군이 잔여 동학세력에 대한 강력한 토벌로 유림이나, 전직 관들이 의병전쟁에 참여할 여력이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옥천지방에서 대표적 의병 활동으로는 무주 덕유산을 본거지로 보은 속리산과 청산, 옥천, 영동, 전북 무주, 장수, 금산 지역에서 활발한 의병투쟁을 전개하던 함양 출신 문태서 의병장이 1909년 9월에 옥천 이원역 기습사건은 괄목할만한 옥천의병 활동의 역사적 가치가 크다.

문태서 의병장이 지휘하고 옥천 박선보 참모가 참가한 덕유산 의병들은 1909년 9월 2일 군수품을 실은 서울행 화물열차가 옥천 이원역에 정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의병 32명을 이끌고 이원역에 당도하여 이원역을 급습하여 폭파시켰다. 이 기습으로 일본인 3명이 부상당했고, 수송 헌병과 의병 간의 전투에서 헌병 3명이 사살되었다. 또 옥천군 안내면 가산사 부근 답양리 지경말에서 1908년 4월 22일 의병 50여 명이 보은 수비대와 교전을 벌여 의병 20여 명이 전사하였다.

  ▲천년고을 구한말 청산군 승격
     일제강점기 1914년 옥천군 편입

청산 지방은 신라의 굴산현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757년(경덕왕16)에 기산현으로 개칭하였고 현재 보은군인 삼년산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년) 기산현을 청산현(靑山縣)으로 지명을 고쳐 경상도 상주에 소속되었고 오늘날 청산(靑山)은 지명 탄생 1,000년의 넘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매우 유서 깊은 고을이다.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년)에 감무를 두고 상주 관할이었고 현재 보은군 내북면 지역인 주성부곡을 병합해서 다시 상주에 예속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403년(태종 3년)에 다시 청산현에 감무를 두었다. 동학혁명 다음해 1895년 을미개혁 때 청산현이 청산군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청산군은 청산, 청성 지역을 관할하며 19년간 존속하였으나,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산군이 옥천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조선시대 청산현 관할은 현재 옥천군 청산, 청성면과 북쪽으로 멀리 보은현을 너머 80리 떨어진 월경지인 현재 보은군 내북면 지역인 주성부곡까지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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