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청산군 한말의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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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청산군 한말의병(3)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0.03.0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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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대한제국 시대인 1896~1897년 을미(1차)의병 기간에 옥천군·청산군 지역에서 의병활동이 미약했는데,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폐와 불안한 치안 형편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특히 지방 군현의 관리들은 수시로 출몰하는 비도나 화적떼화 한 동학군을 진압하는데도 힘겨워서 의병 투쟁에 나설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방의 의병들은 대개가 식량이나 의병의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친일관료 출신과 명문세가, 부자에 대한 보복과 재산 강취로 신변에 불안을 느껴 이들은 치안상태가 다소 나은 관아가 위치한 읍내로 피난하거나 도회지로 이사했다. 그 당시 신문과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구한말 의병과 잔여 동학군을 “비도, 화적, 적경, 활빈당, 비류, 적도, 적당, 의병”이라 지칭하였다. 물론 극히 일부는 의병이라 칭하며 도적질이나 강도질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대개 금전, 재산탈취 등은 의병이나 동학군들의 군비나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방편이며 특히 친일관료나 고관들 집을 습격하여 의병이나 잔여동학군이 필요한 군수품과 생필품을 조달하였다.

▲일제침탈에 국권을 찾기 의병들
 다음은 한말 1차 의병과 1905년 을사(2차)의병 이전까지 옥천군·청산군과 관련한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 보도한 기사를 통해 구한말 옥천군과 청산군에서의 의병과 잔여동학군의 활약을 살펴보자.

▲1896년 7월 14일자 독립신문은 “이 달 7일에 공주관찰사가 군부에 보고하였는데, 지난 달 27일 옥천군수 보고를 보니, 비도 70여 명이 옥천군에 들어 왔다하기로 정탐을 하라고 비밀리 하인을 보내 엿보았더니, 겨우 이십 리를 가서 비도(의병)를 만나 몹시 맞자 온몸이 상하야, 다행이 죽지는 안하였거니와 28일에 비도가 그 고을에 들어와서 환도와 철편으로 무수히 인민들을 때려 백성 이교찬이 죽고 그 외에 세 사람이 상하였는데, 그 후에 비도가 전라도 무주로 간다하기로 군대를 보내어 정탐하야 치거케 하라고 한다더라”라고 덕유산 의병활동을 보도했다.

▲독립신문 1897년 10월 14일 자는 “충청도 보은, 청산, 황간, 영동, 경상도 김산(김천), 개령, 지례에 30~60명이 화적떼가 출몰, 행인 재물을 창탈하며 주민재산을 빼앗고, 묘를 파헤쳐 묘 임자에게 돈을 요구, 방서도 부쳐 부자 돈을 불러 먹으나, 지방관들은 관내에 이런 것을 알면서 잡으려 하지 않고 방치하여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보도기사를 통해 대한제국 초기 충청 남부지역과 경상도 김천 등 소백산맥이 위치한 산악지대는 관의 통제불능, 무인지경으로 치안 부재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독립신문 1897년 연말 보도기사는 “요즘 들어서 의병들의 활동이 잦아들고 동학농민 전쟁 이래로 계속 동학군 지도부 토벌, 추적에 나서던 경무청 당국에서 그의 출신지가 회덕군(대전)과 옥천사람 이중으로 보도된 우체주사 송경인 일행이 최시형 교주를 강원도 원주군 호매곡면 송곡에서 체포하다”라고 최시형 동학 교주의 체포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한편 송경인은 옥천 사람으로 우체주사를 지내며 1901년 12월 4일 보은에서 송팔용 보은 동학포주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한 공으로 시찰사로 진급했다. ▲1901년 9월 14일자 기사에서는 “화적떼 60~70명이 옥천군 양남면(현재 영동 학산) 자작리에 방화하고 전재를 탈취하고 56명을 부상시키고 또 15일에 양남면 기○ ,수○에서 돈을 빼앗고 부녀를 겁탈하며 방화해서 50호를 불태웠다”고 전했다. 일반적으로 1896~1902년까지 의병과 잔여동학군인 비적이나 화적 활동이 뜸했다. ▲1903년 3월 25일 자에서는 “화적 30명이 청산군 서면(청성) 두릉리 육 진사 집에 총을 쏘며 돌입하여 육 진사를 결박하고 재산을 탈취하고 불을 질러 4집이 탔고, 인근 망월리 마을에서 불을 질러 13집이 불태우고 재산탈취와 소를 몰아갔다”를 실었다.

▲황성신문 1903년 5월 1일 자 기사는 “옥천군 군북면 도호리 즉 석호리 진걸 마을의 송판서 집에서 육혈포로 무장한 화적 5명이 비오는 날에 침입하여 집에 있는 물건과 돈을 탈취해 갔다”고 실었다. 또 ▲1904년 12월 기사에서 “충주와 청산에 화적의 활동이 심각해져 연말인 12월 24일 청산군에 수십 명씩 훤한 대낮에 총을 쏘고 집에 불을 지르며, 주민들을 부상시키며 재물을 탈취하는 등 소동이 자주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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