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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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늙지 않는다
  • 권예자 수필가
  • 승인 2020.04.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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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예자 수필가
권예자 수필가

 

마주 오던 어르신이 반갑게 손을 잡는다.


“혹시, 성수 엄마 아니신가? 나 영재 엄마야. 우리가 저 집에 살았잖아. 성수네는 이 아랫집에 살았고…”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집. 내가 젊어서 살던 집과 마주 보이는 일자형 붉은 기와집이다. 영재 엄마, 틀림없는 그분이다. 자세히 바라보니 여든을 넘긴 연세지만 동글한 눈매며 부드러운 입모습, 단아한 몸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머, 아줌마 이게 얼마 만이에요?”


우리는 와락 얼싸안았다. 나는 이 동네 단칸방에서 첫 살림을 시작했다. 첫 집에서 1년을 살고 영렬탑 정문 앞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집은 허술했지만 기역자형 기와집으로 마당이 넓고, 주인과 우리가 방을 두 칸씩 쓸 수 있는 나름 괜찮은 집이었다.


영재 엄마는 우리 집주인 아줌마와 단짝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아이들을 예뻐해서 자주 업어주고 간식도 만들어 주셨다. 일요일이면 내가 집안일을 하도록 아이들을 자기 집에 데려가서 돌보기도 하셨다.


어느 날은 작은 아이가 그 집 화문석 돗자리에 설사해서 엉망이 되었지만, 예쁜 놈 똥은 냄새도 곱다면서 실수한 아이를 껴안고 뽀뽀하고 또 하셨다. 그뿐인가, 당시 여고생이던 영재가 예쁘다고 안아주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을 더듬어서 어린 아가씨가 질색한 적도 있었다.


나는 인덕이 많았다. 첫 집, 둘째 집을 합해 8년의 셋방살이를 했어도 동생처럼 아껴주는 안주인들 덕으로 집 없는 설움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 탑을 돌보시던 할아버지까지도 우리 아이들만은 탑 공원 안에 들어가 놀게 하셨다. 꼬마 형제는 어른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나란히 서서 탑을 향해 거수경례하고 놀았다.


내가 퇴근하고 골목길을 올라오면 연년생 두 아들은 탑 정문 계단에 석양을 등지고 앉아 있다가 “엄마, 엄마” 하며 뛰어와 안기고는 했다. 가난했고, 바쁘고, 힘들었지만 나는 젊었고 아이들은 건강했던 행복한 날들이었다.


우리는 큰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에 이 동네와는 멀리 떨어진 동구에 작은 슬래브 집을 사서 이사했다. 그리고 두 곳을 더 돌아서 35년 만에 다시 이 동네로 온 것이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공원은 영렬탑英烈塔이 있던 자리다. 1942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기초를 쌓고, 해방 후 충남도민이 성금을 모아 탑을 세우고, 6·25 전몰장병의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국립대전현충원이 생기기 전까지 대전에서는 국가적 추모 행사는 늘 이곳에서 했다. 그러나 2009년에 전몰장병의 위패가 보문산 보훈 공원으로 옮겨지고 새로운 영렬탑이 세워지자, 버려진 탑으로 몇 년을 남아있다가 20여 채의 주택과 함께 해체되었다. 그 주택 중에는 내가 신접살림을 차렸던 집도 있었다.


다행히 두 번째 살던 집은 공원 바로 앞에, 새로 난 길 아래에 남아있다. 푸른 지붕에 몇 개의 붉은 기와가 섞였고 구조를 약간 변경하였을 뿐 아직은 건재하여 산책할 때마다 그 집을 들여다본다.


하얀 기저귀가 눈부시게 펄럭이던 빨랫줄, 아이들이 2인용 세발자전거를 타고 내달렸던 넓은 마당이 보인다. 젊은 우리 부부와 해맑기만 한 눈이 큰 아이들 모습도 생생히 느껴진다. 지금은 없어진 마당 한쪽에 있던 수도며, 큰아이가 뛰어내리다 팔이 부러졌던 댓돌이 생각난다.


여름밤이면 주인집과 우리 가족이 모여 수박을 먹으며 많이도 웃었고, 반찬 한 가지도 나누어 먹던 잔정이 훈훈했다. 긴 장맛비에 장롱 위의 천정이 새는 것을 몰라, 혼수 이불이 흠씬 젖어서 속상했던 일도 어제인 듯 선명하다.


예전엔 탑이 세워진 언덕(이쪽에서 보면 언덕이고 저쪽에서 보면 산이었다)을 경계로 남동쪽은 선화동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살았고, 북서쪽은 전쟁 통에 조성된 산동네 빈민촌으로 용두동이었다. 비탈지고 좁은 골목이 이리저리 나 있고, 공동수도와 공동화장실을 사용했다. 해서 길은 늘 질척거렸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래서 선화동 사람들은 용두시장에 볼일이 있어도 지름길로 언덕을 넘어가지 않고 멀리 길을 빙빙 돌아서 다니곤 했다. 나도 그랬다.


지금 그 산동네엔 우리가 사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리고 영렬탑 일대는 5년의 정비작업 끝에 ‘양지근린공원’이 조성되어 보름 전 개원했다. 덕분에 초등학교운동장을 돌던 나도 요즘은 쾌적한 산책로를 걷는다. 옛집을 바라보며 잊었던 추억을 하나하나 되새김질하면서.


영재 엄마도 이 동네를 떠난 지 오래신데, 여기 공원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궁금해서 오셨단다. 우리는 옛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공원을 산책했다. 무궁화 무늬가 새겨진 계단을 올라 가장 높은 곳에 세운 옛 탑을 상징하는 조형물도 보았다. 사위와 저녁 약속이 있다며 다음을 기약하고 떠나시는 아주머님의 뒷모습은 밝은 노을빛이었다.


다정했던 사람 사이에는 세월도, 얼굴의 주름살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래전 함께 그려 넣었던 추억만이 곱디곱게 살아나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을 뿐이다. 마치 찻잔 속의 마른 들국화가 천천히 피어나며 향기를 전하듯이.


프랑스 속담에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노인은 추억에 산다는 말이 있는데. 내게는 종종 추억이 현실보다 선명할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늙을 줄 모르는 추억이 환하게 되살아 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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