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풍(擧風)이 이는 봄에 기대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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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풍(擧風)이 이는 봄에 기대어(2)
  • 임난숙 둔포중학교 교사
  • 승인 2020.05.2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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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난숙둔포중학교교사
임난숙둔포중학교교사

-지난호에 이어
그리움은 담아도 풀어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서울역에서 내려 몇 호선 전철로 갈아타서 어느 역에서 내려 어느 출구로 나오라는 선생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동국대학교. 정문에 서 계신 분이 마중 나오신 선생님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요즘 아이들 말대로라면 ‘진리’다.

교정을 거쳐 따라 올라간 연구실은 실로 감동의 공간이었다. 크지 않은 공간에 빽빽하게 채워진 책장이며 소박한 응접세트에 작은 싱크대까지 여느 교수님 연구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선생님의 소박하고 정갈한 성품을 읽을 수 있는 연구실엔 오래 달여 낸 차의 향긋함이 은은하게 퍼져 흐르고 있었다.약속 시간 한참 전에 나오셔서 차를 달여내시던 선생님. 차 한 잔에 담긴 선생님의 정성과 기다림을 조심스럽게 마시며 ‘내가 그리워하던 선생님’이 진정 ‘내가 바라고 꿈꾸던 선생님’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내 교직관에 ‘거풍’이 일어났다.

선생님이 살아오신 그동안의 삶을 들으면서 내 마음이 내 생각이 내 삶이 거풍되는 떨림을 느꼈다. 이렇게도 살 수 있는 거구나, 이런 삶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또 다시 아뜩한 어지러움이 일었다. 잔잔한 미소로 들려주신 따뜻한 이야기가 내 삶의 계절을 바꾸어 놓기 시작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전철역까지 배웅 나오셔서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며 손에 들려주신 꿀단지엔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선생님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몇 해 뒤 늦가을, 아침에 기운 없어 주저앉던 어머니께서 다음날 뇌경색으로 병석에 눕게 되셨다. 5년간의 병상 생활의 시작이었다. 아버지 떠나시고 6년 만에 맞은 엄마의 힘겨운 사투에 곁을 지키며 날마다 가슴 꺼지는 아픔을 누르며 회복을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이어졌다.

이런 시간의 길어짐으로 웃음도 기쁨도 고개 숙이고 있을 때, 서설(瑞雪)처럼 나의 선생님이 병실로 찾아오셔서 엄마의 손을 꼭 잡으시며 따뜻함으로 위로하시고 귀한 약재까지 갖고 오셔서 회복을 기원해 주시고 가셨다. 분명 선생님은 서설이셨다. 그 날 이후 엄마도 나도 우리 가족도 마음에 한 줄기 빛을 다시 찾아 즐겁게 엄마를 간호해 드리게 되었으니...

 

“남산기슭의 언덕을 오를라치면 한가롭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길게 가지기 위해서 일부러 먼 길로 돌아서 가기도 한다. 사색의 대상은 수시로 바뀌지만 번잡한 일상에서도 가장 자주 떠올라 내 삶의 소중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생각은 바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복잡한 도심을 오가면서 왈칵왈칵 떠올리는 어머니로 인해 나는 지금껏 그래도 순수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지금은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신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내가 이 도회의 어디에 있든 단 한 순간도 어머니를 잊어 본 적이 없다. 생사의 길이 달라서 만나 뵈올 수는 없지만, 내 마음속 한가운데서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분이다. 간혹 늦은 밤 지인들과 어울리다 술이라도 한잔하고 들어오는 날이면, 조용히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움의 모습이 더욱 짙어진다.”며 어머니에 대한 단상(斷想)을 들려주신 선생님으로 인해 다시금 깨닫게 된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 저 먼 곳에서부터 하나하나 불러와 세워 갔다.


5년간 엄마와 속 깊은 이야기를 눈과 입으로 손과 몸으로 나누는 동안 선생님은 전화로 문자로 위로와 용기를 주시고 했다. 그 힘으로 지난 가을 엄마를 배웅하는 순간까지 함께 계심만으로도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다.

어느 새 내 삶이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모습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기대감과 설렘을 갖게 하는 모퉁이, 그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계절을 맞고 새 모습으로 삶을 가꾸어 나가게 되는 거풍이 이루어지는 곳. 그곳에 나의 선생님이 서 계신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상황 속에서 따뜻하게 거풍해 주시는 나의 선생님이 계신다. 수십 년 삶을 거풍한 그 ‘그리움’이 이젠 수십 년 삶을 거풍할 ‘멘토’가 되어 오늘도 내 하루를 푸진 햇살로 채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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